(40)진정한 앎, 공허한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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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현 교수가 수술을 하고 있다. / 양산부산대병원 제공

최병현 교수가 수술을 하고 있다. / 양산부산대병원 제공

나는 철학자 중에서 아르투어 쇼펜하우어(1788~1860)를 가장 좋아한다. 그가 철학의 어려운 문제를 대부분 해결했고, 그것을 자신의 철학 내에서 정합성 있게 설명해 냈다고 믿기 때문이다. 물론 쇼펜하우어가 철학을 전공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는 인기도 없고, 연구자가 별로 없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나는 그래도 쇼펜하우어를 좋아한다.

쇼펜하우어는 이마누엘 칸트(1724~1804)의 인식론을 이어받아 이 세상 모든 것은 우리의 지각(Perception)을 통해 얻은 하나의 표상(representation)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세상을 우리의 감각기관으로 파악하는데, 그것은 뇌를 통해 표상이라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표상을 만드는 능력은 인간이나 동물이나 모두 가지고 있는데, 쇼펜하우어가 보기에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표상의 표상, 그러니까 추상적인 개념(concept)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이 추상적인 개념이 지각으로부터 유도된 것이라면 그건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만, 문제는 그렇지 않은 개념들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모든 철학의 주어진 대상이란 경험적 의식(empirical consciousness)에 지나지 않는데, 이 경험적 의식은 다시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self-consciousness)과 나머지에 대한 의식(external perception)으로 나뉠 수 있다. 이것들 외에서 출발한 모든 철학, 그러니까 임의로 선택한 어떤 개념, 예를 들어 절대, 절대자, 신, 무한, 유한, 진아, 존재, 본질 등에서 시작한 철학은 신기루에 불과하며 어떠한 실제적인 결과로 이끌지도 못한다.”

숱한 경험과 좌절이 전문의 통과의례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진정하며 가치 있는 지식은 우리의 감각기관을 통해 직접적으로 경험한 것에 한정된다는 뜻이다. 의사, 특히 외과의사의 입장에서는 이 말을 절절히 수긍할 수밖에 없다.

의대생 때 열심히 해부학 교과서와 해부학 그림을 보고 난 뒤라도 실제 시신을 해부해 사람 몸 안을 들여다보면 그림으로 보았던 그 구조물이 맞는지 아닌지, 그 그림이 이것인지 저것인지 몰라 당황하고는 했다. 아마 거의 모든 의대생이 같은 경험을 갖고 있을 것이다. 만일 해부학을 잘 아는 사람이 그 광경을 봤다면 답안지가 뻔히 눈앞에 있는데도 답을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다고 조소할지 모른다.

시간이 흘러 전공의가 되어 처음에는 제2 조수, 나중에는 제1 조수로 수술에 참여하면서, 곁눈질로 교수님이 하는 수술을 배우면, 또 다른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기분을 느꼈다. 하루는 노교수님께서 수술하다가 담낭관(cystic duct)을 가리키며, “이게 무슨 구조물이지?” 하고 물으셨는데, 나는 “온쓸개관(common bile duct)입니다”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했다가, ‘우리나라 해부학 수업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핀잔과 야단을 맞은 기억도 있다. 그 당시만 해도 수술장에서 전공의들을 붙잡고 하나하나 가르쳐주는 교수님들은 없었다. 그저 교수님이 하는 수술, 그리고 위 연차가 하는 조수의 역할을 눈치껏 배우다 보면 나도 모르게 또 그렇게 수술 조수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열심히 수술 조수를 하다가 보면, 어느 날은 칭찬도 받게 되고, “이 부분은 자네가 이리 와서 해보게” 하는 권유도 받게 된다. 그런데 항상 환자의 왼쪽에서 조수만 하다가 환자의 오른쪽에 가서 수술 집도의가 되면 또 다른 세계가 다시 열리게 된다. 당황에서 이것저것 건드리다가 교수님께 혼이 나고, 다시 조수 자리로 쫓겨난 경험은 외과의사라면 누구나 있을 것이다.

전문의가 갓 되고 나서도 혼자 많은 수술을 집도해본 경험이 없다 보니, 막상 수술을 하게 되면 매우 두려웠다. 국제협력의사를 지원해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에 가게 된 숨은 동기 중 하나도 거기 가서 많은 수술을 직접 해보고 싶어서였다. 그렇게 에티오피아에서 2년 반 동안 지내면서 그 나라 실정에 맞는 수술을 하다가, 이제 전임의를 하려고 다시 한국에 돌아와 이식수술을 오랜만에 보니까, ‘저렇게 미세한 수술을 내가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티오피아에서는 대부분 과감하고 시원시원하게 수술을 할 수 있었다. 복잡한 수술을 해야 할 때는 거의 없었다. 그러니 장기이식 수술과 미세하고 섬세한 수술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렇게 한국에 와서 2년간의 전임의 생활을 밤낮없이 보내고 나서, 양산부산대병원에 부임하고 약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제는 수술이 무섭다거나 못하겠다는 것은 없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고, 그렇게 돼서도 안 될 것이다. 전공의나 의대생들에게 수술하다가 구조물을 물어보고 야단치는 역할을 내가 하고 있지만, 그저 책 속의 하나의 개념으로만 있던 지식을 진정한 앎으로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그런 과정을 겪어야 한다고 믿는다.

정부의 의대 증원 정책은 현실과 괴리

제 역할을 하는 외과전문의가 되기 위해서는 책으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다양한 경험과 좌절을 겪어야 한다. 그런데 이번 정권에서 시행하는 의대 증원 정책은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당위와 고위 공직자의 머릿속에만 있는 개념만 가지고 시행되고 있는 것 같다. 1980년대에는 수백명이 한 강의실에서 공부해도 문제가 없었다든지, 50명 정원이 150명이 되더라도 의학 교육은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든지, 수업을 안 듣고 교양에서 F학점을 받아도 진급을 시키겠다든지 하는 말을 들으면 현장에 있는 나로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현실감이 없어지는 기분이다.

나는 법에 대해 모르기는 하지만 법도 원래 근본은 표상에서 나왔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어느새 법을 휘두르는 사람들은 현실과 괴리된 당위와 막무가내식 밀어붙이기를 한다. 이제는 법이란 것이 어디서 유래됐는지도 모르는 표상의 표상으로 전락한 것은 정의의 여신이 눈을 가리고 있기 때문일까?

<최병현 양산부산대병원 간담췌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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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최정예 겁쟁이들
오늘을 생각한다
대한민국 최정예 겁쟁이들
제2차 세계대전 전범의 아들 노다 마사아키가 쓴 <전쟁과 죄책>에는 포로의 목을 베라는 상관의 명령을 거부한 병사의 이야기가 나온다. 일본 관동군 중대장으로 근무했던 도미나가 쇼조의 증언에 따르면 중국 후베이성에서 포로를 베는 ‘담력’ 교육 도중 한 초년 병사가 “불교도로서 할 수 없습니다”라며 명령을 거부했다. 불교도로서 ‘살생하지 말라’는 계율을 지키려 했던 이 병사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홀로코스트 연구자 크리스토퍼 R. 브라우닝이 쓴 <아주 평범한 사람들>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학살 임무를 거부하고 총기를 반납한 나치 대원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독일 101예비경찰대대 빌헬름 프라프 대대장은 유대인 학살 임무에 투입되기 직전 병사들에게 “임무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면 앞으로 나오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10명 남짓 병사가 앞으로 나왔고, 그들은 소총을 반납하고 대기했다. 그 병사들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각 부대에서 학살 임무를 거부한 병사와 장교들이 속출했지만, 나치 독일의 가혹했던 군형법은 이들에게 명령불복종죄를 비롯한 어떠한 형사처벌이나 징계도 내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