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주 권리를 합법적으로 뺏는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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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성 기자

김은성 기자

자본시장이 선진화된 주요국과 달리 국내에서는 일반 주주가 권리를 빼앗기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최근에는 두산, SK 등을 비롯한 기업들이 대주주에게 유리한 지배구조 개편에 나서 논란에 휩싸였다. 기업들은 각사 사정에 따라 미래 산업에 대한 선택과 집중을 내세우며 자본시장법에 따른 분할·합병이라고 역설한다. 하지만 합법적으로 진행한 지배구조 개편이 합병 대상이 되는 계열사들의 기업가치를 훼손한다는 비판이 국내외 투자자들 사이에서 제기되고 있다. 합병 비율이 결과적으로 대주주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수단이 될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지만, 일반 주주는 피해를 구제할 실효성 있는 수단이 없다.

의류 브랜드 ‘탑텐’ 등을 보유한 신성통상은 2019년 일본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이 벌어지자 유니클로를 대체하며 급성장했다. 하지만 지난 6월 돌연 공개매수를 통한 상장폐지에 나섰고, 헐값에 주식을 팔아야 하는 주주들은 난감한 상황에 부닥쳤다. 반면 사주일가는 상장폐지를 통해 잉여금을 독식하고 신성통상에 대한 지배력을 높일 수 있다. 시장 안팎에서는 증시 밸류업(value-up·기업 가치 향상)에 역행하는 기업들의 행보가 상법 개정을 자초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지난 8월 8일 자산운용사 최고경영자와 간담회에서 “지배주주의 이익만을 우선시하는 기업경영 사례가 반복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이사의 충실의무와 관련한 원칙 중심의 근원적 개선방안을 논의해야 한다”며 상법 개정의 필요성을 재차 역설했다.

상법(제382조 제3항)은 기업의 이사가 ‘회사’를 위해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금융투자업계 전문가들은 국제 표준(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춰 ‘회사’에 ‘주주’를 추가해 일반 주주 권익을 명시적으로 고려하는 내용의 상법 개정을 추진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사회가 특정 주주나 사주일가의 이익을 우선시하면 기업가치가 제대로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윤석열 대통령도 올해 1월 초 거래소를 방문해 상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법무부·재계 등의 반대로 밸류업 방안에는 빠졌다. 하지만 대주주에게 유리한 새로운 기법이 쏟아지는 가운데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 등의 규제가 없으면 밸류업은 ‘찻잔 속 태풍’으로 끝날 공산이 크다. 대주주의 꼼수와 편법 행위를 제어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지 않으면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김은성 기자 ke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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