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빛 구름이 일렁인다. 백일 동안 꽃을 피운다는 배롱나무꽃. 뙤약볕에 한 걸음 내딛기도 힘든 여름날이었다. 전남 담양의 명옥헌 원림은 배롱나무꽃이 절정을 이루며 여름의 한가운데를 통과하고 있었다. 바람이 불면 나무 위에 걸린 구름이 흔들리고, 다시 바람이 일면 후드득 꽃비가 쏟아졌다. 연못 뒤 숲속 그늘에 얌전히 앉은 누각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더위도 썩 견딜 만했다.
원림은 정원을 의미한다. 명옥헌은 1625년, 명곡 오희도의 넷째 아들 오이정이 아버지를 기리며 지었다. 오희도는 당대의 인재 중 인재였다. 인조가 왕위에 오를 때 인재를 찾는 과정에서 그를 발견했고, 세 번이나 찾아와 당신의 사람이 돼주기를 청했다. 그러나 끝내 오희도는 거절의 뜻을 밝혔다. 연로한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이유였다. 인조가 찾아오던 그때도 그는 이 자리에 머물렀다고 전한다.
한국의 정원은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풍경이라 했던가. 이곳은 그 말의 의미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사람의 손이 닿았지만, 그 뒤로는 오랫동안 자연의 숨결이 공간을 다듬어 왔다. 지형과 지물을 되도록 고스란히 살려 그 속에 녹아들었다. 풍요로운 남도의 대지, 그중에 담양을 골라 지은 정원. 온갖 욕망이 뒤얽힌 도시를 등지고 이곳에 앉아 있노라면, 한없이 평화로울 수 있을 것만 같은, 여름이다.
<글·사진 정태겸 글 쓰고 사진 찍으며 여행하는 몽상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