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서 금 5개로 새역사…‘왜 이렇게 잘하나’ 모두가 질문
‘한국양궁은 왜 이렇게 잘하나.’
세계선수권이나, 올림픽에서 한국양궁이 경이로운 실력을 올릴 때면 거의 매번 나오는 질문이다. 2024 파리올림픽 3관왕 김우진도 같은 질문을 받았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때 남자단체 금메달을 딴 선수들은 한 외국 기자로부터 “100m 밖에서 동전 한가운데를 뚫을 수 있느냐”는 엉뚱한 질문을 받기도 했다.
‘동쪽의 활 잘 쏘는 민족’의 후예로 재능을 타고났다는 말은 전설일 뿐이고, 직업으로 활을 쏘는 선수들이라 유리하다는 말도 중국, 대만 등 형편이 같은 대부분 아시아 선수들을 보면 정확한 분석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로 한국양궁은 강할까. 파리올림픽에서 거둔 한국 선수들의 믿기지 않는 성과와 준비과정을 살피면서 답을 찾으면 좋을 것 같다.
2024 파리올림픽 양궁 남자 개인전 결승은 역대 최고 명승부였다. 한국 남자팀 맏형 김우진과 미국의 간판 브래디 엘리슨이 치른 결승전은 5세트에서 두 선수 모두 30점 만점을 쏘고 5-5로 비겨 마지막 딱 한 발을 쏘는 슛오프를 남기고 있었다.
슛오프는 잔인한 게임이다. 같은 10점을 쏘더라도 과녁 정중앙에 더 가깝게 쏜 선수가 이기는 단발 승부다. 김우진이 먼저 쏜 화살은 과녁에서 8시 방향으로 9, 10점 사이 경계선에 꽂혔다. 10점. 엘리슨도 주저 없이 시위를 당겼고, 화살은 12시 방향 9, 10점 사이 경계선에 꽂혔다. 역시 10점.
TV로 지켜보던 국민이 잠시 숨죽인 찰나, 한국선수단에서 환성이 터져 나왔다. 화면에서 금세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김우진의 화살이 중앙에 가까웠다. 4.9㎜, 약 0.5㎝ 차로 승리한 김우진이 상대 엘리슨과 뜨겁게 포옹하고 서로 손을 들어주며 환호하는 관중에 인사하는 장면은 파리올림픽 전반부의 최고 하이라이트였다.
전 종목 석권 꿈 1년 전부터 진행
한국양궁은 김우진의 짜릿한 우승을 끝으로 2024 파리올림픽에서 금메달 5개를 전부 차지하는 새 역사를 썼다. 남녀 개인전과 단체전만 치러진 2016 리우올림픽에서 금 4개를 싹쓸이한 한국은 남녀 혼성경기가 추가된 2020 도쿄올림픽(2021년 개최)에서 남자 개인전을 제외한 금 4개를 땄고, 이번에는 기필코 전 종목을 석권했다.
양궁은 사격, 펜싱과 더불어 연일 낭보를 전해 한국 선수단이 파리에서 기대 이상의 대성공을 거두는 기폭제가 됐다. 임시현, 전훈영, 남수현이 여자단체전 결승에서 중국을 슛오프 끝에 5-4로 물리쳐 1988 서울올림픽 이후 10연패 신화를 썼고 김우진, 이우석, 김제덕이 남자단체전 결승에서 홈팀 프랑스를 5-1로 누르고 리우올림픽 이후 3연패를 달성했다.
승전보는 계속됐다. 남녀 에이스 김우진과 임시현이 나선 혼성경기에서는 승승장구한 끝에 결승에서 독일 커플(미셸 크로펜-플로리안 운루)을 6-0으로 완파하고 3번째 금메달을 더했다. 이어 여자 개인전에서는 임시현과 전훈영이 결승에서 맞붙어 금, 은메달을 나눠 가졌고 마지막 날 김우진이 역대 올림픽 양궁 사상 최고 명승부를 연출하며 피날레를 장식했다.
기록잔치였다. 한국은 올림픽에서 여자 단체전이 처음 생긴 1988 서울올림픽 이후 한 번도 놓치지 않고 10회 연속 우승을 거둬 올림픽 최다 연속 우승 기록을 이어갔다. 중국 여자탁구 개인전, 여자 다이빙 3m 스프링보드의 10연패와 나란히 현재 진행 중인 최고기록이다.
리우올림픽과 도쿄올림픽에서 연달아 단체전 금메달을 따낸 김우진은 파리에서 금 3개를 더해 금메달 4개를 딴 신궁 김수녕, 사격 진종오를 넘어 한국 올림피언 최초로 5관왕이 됐다. 남자 개인전에서 이우석이 동메달을 더해 한국양궁은 파리에서 금 5, 은 1, 동 1개로 역대 최고성과를 거뒀다.
한국양궁은 1984년 LA올림픽에서 서향순과 김진호가 여자 개인전 금, 동메달을 딴 이래 한 번도 기대를 저버린 적이 없다. 이후 11차례 올림픽에서 금 32개, 은 10개, 동 8개를 획득했다.
파리올림픽 전 종목 석권 꿈을 향한 출발은 1년 전부터 구체적으로 착실히 진행됐다. 파리올림픽 양궁경기가 열린 앵발리드가 전쟁기념관이라는 점에 맞춰 국내종합대회인 정몽구배를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치러 올림픽을 향한 출발을 알렸다. 공정한 기록경쟁을 통해 대표선수를 선발한 뒤에는 센 강변에 위치한 앵발리드 광장과 비슷한 풍향, 풍속 등 조건을 갖춘 경기 여주 남한강가 경기장을 찾아 바람 적응훈련을 했다.
충북 진천 국가대표선수촌에는 파리 앵발리드 경기장과 외관, 사대 높이 등 경기 조건이 100% 일치하는 모의 훈련장을 설치했고, 적중률이 높은 슈팅 로봇과 대결하는 등 상상하기 힘든 훈련을 이어갔다. 선수들이 큰 대회에서의 부담감을 조절할 수 있도록 국내 최고권위자 3명의 도움을 받아 심리훈련도 지속해서 실시했다.
1년 전부터 경기장 근처를 살펴 앵발리드에서 200m 떨어진 곳에 선수단 숙소를 잡았고, 호텔의 한 층을 전부 빌렸다. 진천 국가대표선수촌 출신 영양사가 파리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등 선수단 몸 관리에 완벽을 기했다.
실력 위주 대표 선발 등 시스템 구축
이런 준비는 지난 10차례 올림픽 도전에서도 세부적인 내용만 바뀌었을 뿐 똑같이 반복됐다. 한밤 공동묘지 담력훈련, 심야 도보 극기훈련, 번지점프, 고공 사대훈련, 가상현실 시스템 등을 거쳐 최근에는 실제 경기장과 같은 세트를 선수촌에 설치하는 완벽을 추구했다.
협회는 수십 년에 걸쳐 초·중·고 학생선수들이 꿈나무 대표, 청소년 대표, 국가대표 후보, 상비군을 거쳐 국가대표로 성장하는 시스템을 구축했고 이를 통해 성장한 자원들을 기록, 실력 위주의 국가대표 선발전을 통해 뽑아 국제무대에서 경쟁하게 했다.
한 번도 흔들림 없었던 실력 위주의 국가대표 선발 원칙은 한국양궁을 지탱해온 힘이었다. 2020 도쿄올림픽이 코로나19 대유행으로 1년 연기됐을 때는 대표 선발전을 다시 치르는 결단을 내리기도 했고 파리올림픽 여자대표선수 중에 국제대회 경험이 현저히 적은 남수현, 전훈영에 대한 불안감이 커질 때도 협회는 흔들리지 않았다.
장영술 대한양궁협회 부회장은 “기록경기에서 성적 위주의 대표선발 원칙을 사수해온 것이 한국양궁이 40년 이상 승승장구한 비결일 것”이라며 “그걸 지키지 못하면 한국양궁은 무너지고 말 것”이라고 말했다. 김우진도 파리에서 외국 기자들이 한국양궁이 강한 이유를 묻자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고, 모든 선수가 동등하게 경쟁한다”고 대답했다.
양궁협회가 조금의 분열이나 잡음, 파벌 싸움이 없는 이유는 무엇보다 서울올림픽 때부터 회장사를 맡아온 현대자동차그룹의 헌신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때부터 5번째 올림픽을 치르며 두 번째 ‘퍼펙트 골드’ 신화를 쓴 정의선 회장은 그룹 경영을 미뤄두고, 이번에도 올림픽 기간 내내 협회를 현장에서 이끄는 열성을 보였다.
투자한 만큼 거둬들인 완벽한 올림픽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그가 협회 집행부에 한 말은 “내일부턴 2028년 LA올림픽을 준비하자”는 것이었다. 도쿄올림픽이 끝난 날 “이젠 파리올림픽을 준비하자”고 했던 것처럼.
<김경호 선임기자 jerom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