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을 나서면서 이 모든 깨알 같은 슈퍼히어로 영화들의 인용과 데드풀 자체라고 할 라이언 레이놀즈의 미국식 농담이 팬층을 넘어서 일반 관중에게 소구력이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아, 이건 데드풀 영화였지. <데드풀과 울버린>이 시작한 지 몇 분도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이야기 구성은 현란한 싸움 장면을 보여주고 그렇게 이르게 되는 과정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데드풀>(2016)과 같다. <데드풀> 특유의 ‘제4의 벽을 깨는-스크린 너머의 관객들에게 말을 거는’ 냉소적인 농담과 함께. 영화 제목이 ‘울버린과 데드풀’이 아니라 <데드풀과 울버린>인 이유다. 이 영화가 울버린 영화였다면 ‘울버린 10편’이 됐을 것이다.
우리는 <엑스맨> 시리즈를 포함해 울버린/로건의 ‘최후’를 알고 있다. 그래픽 노블 <울버린: 올드맨 로건>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로건>(2017)에서 울버린의 유전자로 만들어진 소녀 X-23 로라와 친구들은 캐나다로 떠나기 전, 국경의 어느 산골짜기에 울버린을 묻었다. 로건/울버린 역을 맡은 배우 휴 잭맨도 “다시는 울버린 역을 맡을 일은 없을 것”이라고 그때 말했다. 이듬해 나온 영화 <데드풀 2>에서는 아예 울버린이 자신의 클론 X-24에 당해 나뭇가지에 가슴이 관통된 모습의 미니어처가 스쳐 가듯 등장한다. 그런데 7년 만에 다시 돌아왔다.
7년 만에 스크린에 복귀한 울버린
사실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긴 했다. <데드풀 2> 쿠키 영상에서 데드풀이 미래에서 자신의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과거로 온 ‘케이블’의 시간 이동 장치를 고쳐 과거 타임라인을 마구 바꾸는 장면이 나왔기 때문이다. <데드풀> 1편과 2편에서 깨알같이 이 ‘남자 중 남자’ 울버린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드러내는 이스터에그를 곳곳에 숨겨뒀으니 결국 울버린이 죽기 전으로 시간 이동해 죽음을 막는 건 충분히 상상해봄 직한 이야기다. 그뿐인가.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2021) 이후 MCU(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 ‘멀티버스’ 개념이 도입되면서 영화는 난해해졌지만, 영화를 만드는 건 아주 편해졌다. 데드풀이 모종의 이유로 울버린을 데려와야 한다면 평행우주에 무한대로 존재하는 ‘다른 울버린들’ 중 한 명을 픽업하면 되기 때문이다.
멀티버스 개념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난해 이야기겠지만 이 영화에서는 TVA(시간 변동관리국)라는 조직이 등장한다. 이들은 ‘신성한 시간선’이라는 걸 관리하며 시간과 차원을 넘나드는 캐릭터들 때문에 예정과 다른 시간선이 만들어지면 바로잡는다. 전편에서 미래에서 온 시간 이동 장치로 마음대로 역사를 바꿔버렸으니 데드풀이 이 조직의 ‘제거 대상’이 되는 걸까. 결국 TVA에 끌려간 데드풀은 뜻밖의 이야기를 듣는다. 각각의 평행우주 시간선에서 줄거리의 주축 인물을 앵커(anchor)라고 하는 데 자신이 있던 지구의 앵커는 울버린이었다는 것이다. 앵커가 사라지면 그 세계는 소멸한다. 그러니까 자신이 있던 지구는 소멸 예정이라는 것. 데드풀은 자신의 지구를 구하기 위해서 평행우주상 ‘울버린들’ 중에서 최적의 인물을 찾아 나선다.
잊힌 캐릭터들의 깨알 같은 등장
분명 원작 코믹스와 MCU라는 세계관에 매료된 팬들이 환호할 만한 요소를 영화는 듬뿍 담고 있다. 각기 다른 설정의 수많은 울버린, 그리고 레이디 데드풀을 위시한 데드풀 군단의 깨알 같은 등장도 마니아층의 기대를 충족시킬 것이다. TVA는 제거된 캐릭터들을 영화 <매드맥스> 시리즈가 형상화한 포스트 아포칼립스적 세계인 ‘보이드’로 보내는데, 거기서 관객들은 거의 잊힌 과거 <엑스맨> 시리즈와 폭스/마블의 슈퍼/안티히어로 캐릭터를 여럿 만나게 된다.
극장을 나서면서 이 모든 깨알 같은 슈퍼히어로 영화들의 인용과 데드풀 자체라고 할 라이언 레이놀즈의 미국식 농담이 팬층을 넘어서 일반 관중에게 소구력이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데드풀은 <어벤져스: 엔드게임>(2019) 이후 스텝이 꼬여버린 듯한 MCU를 구원하는 구세주가 될 수 있을까.
제작연도: 2024
제작국: 미국
상영시간: 128분
장르: 액션
감독: 숀 레비
출연: 라이언 레이놀즈, 휴 잭맨, 엠마 코린, 모레나 바카린, 롭 딜레이니, 레슬리 우감스, 카란 소니, 매튜 맥퍼딘
개봉: 2024년 7월 24일
등급: 청소년 관람 불가
수입/배급: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엑스맨 탄생: 울버린>에서 이미 만난 울버린과 데드풀
데드풀과 울버린이 격돌한 것은 <데드풀과 울버린>이 처음은 아니다. 엑스맨 유니버스의 스핀오프 작품으로 울버린의 과거사를 다룬 영화 <엑스맨 탄생: 울버린>(2009·사진 맨 왼쪽이 <데드풀> 라이언 레이놀즈가 연기한 웨이드)에서 데드풀이 되기 전 멀쩡한 얼굴의 ‘웨이드’가 나온다. 그는 이 영화에서 데드풀의 트레이드 마크인 등에 꽂은 2개의 카타나(일본도)를 들고 울버린과 대결을 펼친다. 이 버전의 웨이드는 사실상 사기 캐릭터에 가깝다. 전 세계 뮤턴트들을 모은 스트라이커 대령은 로건을 비밀인간병기 ‘웨폰X’로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다. 스트라이커 대령은 원래 재생능력(힐링 팩터)을 지녔던 로건/울버린의 전신 뼈에 아프리카에 떨어진 운석에서 채취한 가상의 금속 아다만티움을 주입해 천하무적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로건과 같은 특수부대 소속이었던 웨이드에겐 아다만티움 골격뿐 아니라 불을 뿜는다든가 투명인간이 되게 한다든가 하는 돌연변이 유전자를 총집결시켜놓았다. 영화 막판 둘은 스리마일섬 원자로 위에서 격돌한다. 어찌어찌해 스리마일섬 원자로가 붕괴하면서 ‘천하무적 웨이드’가 같이 묻히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그런데 이때 울버린은 정말 웨이드를 물리친 걸까.
<데드풀 2> 쿠키 영상에서 이들이 만나는 장면은 재사용된다. 다만 갑자기 나타난 데드풀이 막 모습을 나타낸 ‘인간병기’ 웨이드의 머리에 총을 쏴 처치해버렸기 때문에 울버린과 웨이드의 재대결은 이뤄지지 않는다는 나름 해피엔딩을 제시한다. 그런데 이 세계관의 설정에 따르면 아다만티움으로 강화된 돌연변이는 아다만티움 총알로만 죽일 수 있다. 어차피 쿠키 영상이니 데드풀의 짓궂은 농담쯤으로 치부하고 넘어가면 그만이겠지만 진지하게 말한다면 이는 해결되지 않고 어물쩍 넘어간 것으로 봐야 한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