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이 만든 K-9 자주포가 러시아의 위협에 대비하는 상징적 무기로 자리 잡았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하고 있는 가운데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루마니아도 최근 러시아의 군사적 팽창을 우려해 K-9 자주포를 도입하기로 했다. 루마니아는 한국산 자주포 K-9을 도입하는 10번째 국가다. 나토(NATO) 회원국으로는 6번째다. 10개국 가운데 절반인 5개국이 러시아와 인접하고 있는 국가다. 루마니아는 K-9 자주포 54문과 K-10 탄약운반차 36대, 정찰·기상 관측용 차륜형, 장비탄약 등을 패키지로 2027년부터 도입할 계획이라는 게 제작사인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설명이다. 총 1조3828억원 규모다.
현재 K-9 자주포를 운용하고 있는 나라는 한국(1999년 계약). 튀르키예(2001년), 폴란드(2014·2022년), 노르웨이(2017년), 핀란드(2017년), 인도(2017년), 에스토니아(2018년), 호주(2021년), 이집트(2022년) 등이다.
■러시아와 ‘K-9 벨트’
국제 무기 시장에서는 수년 전부터 ‘K-9 벨트’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폴란드, 에스토니아, 핀란드, 노르웨이 등 동유럽 및 북유럽 국가들이 K-9을 집중적으로 구매해서 나온 말이다. 이들은 모두 러시아 인접 국가다.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에 대비해 앞다투어 K-9 자주포를 도입했다. 결과적으로 K-9이 러시아를 벨트처럼 둘러싸고 있는 모양새가 됐다. 여기에 루마니아도 가세했다. 통상 무기 도입은 10년 이상 걸리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 국가는 비교적 짧은 기간에 K-9을 구매했다. 최근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이 급상승한 결과다. 이에 편승해 한국이 K-9 특수 효과를 누리고 있다. 재주(위협)는 러시아가 부리고 돈(수출)은 한국이 챙기고 있는 셈이다.
K방산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한 K-9 자주포의 수출은 김대중 정부 때 시작했다. 1999년부터 국내에서 양산하기 시작한 K-9은 2001년 터키(현 튀르키예)에 총 280문 수출 계약을 체결한 것을 시작으로 올해 윤석열 정부에 이르러서는 루마니아 수출로까지 이어졌다.
제작사는 유럽의 분위기가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으로까지 이어져 제2의 ‘K-9 벨트’가 형성되기를 내심 기대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K-9 자주포에 대한 정보를 지속해서 수집하고 있고, 베트남도 관심을 두고 있다. 몇몇 국가는 군 고위관계자들이 방한해 직접 자주포 사격 시범을 참관했다.
수출 초기에 K-9은 고객 요구에 맞춘 ‘맞춤형 수출 전략’을 택했다. 2014년 핀란드가 예산이 부족하다고 하자 한국군이 쓰던 중고 K-9을 정비해 새 자주포의 절반 가격으로 수출했다. 중고 K-9의 수출은 처음이었다. 중국에 맞서는 군사 강국인 인도에는 ‘메이드 인 인디아’ 정책에 맞춰 현지에서 생산하는 방식을 택했다. 호주와도 현지 생산 방식으로 공급계약을 맺었다.
국제 무기 시장의 ‘핫 잇템’으로 급부상한 K-9은 포신 길이만 8m에 달한다. 자주포는 별도의 차량이 필요한 견인포와 달리 스스로 움직이는 화포다. 그만큼 기동력과 화력이 뛰어나다. 사거리 역시 유도탄을 제외하고는 지상화력 중 가장 길다.
■왜 ‘나인(9)’인가
K-9의 이름을 다 풀어쓰자면 ‘K-9 155㎜ 자주곡사포 천둥(Thunder)’이다. 무기 이름은 ‘개념설계’ 때, 설계대로 움직이는지 시험할 때, 전력화할 때 그때그때 조금씩 달라진다. 국방과학연구소(ADD) 화포체계실은 1989년 K-9을 처음 만들 당시 ‘신형 155㎜ 자주곡사포’라고 명칭을 부여했다. 별칭은 ‘천둥’이었다. 이에 따라 ADD는 연구개발을 완료한 1998년까지 10여 년 동안 ‘신자포’ 사업이란 이름으로 K-9의 개발 및 전력화 사업을 진행했다. 신자포는 ‘신형 155㎜ 자주곡사포’를 줄인 말이다.
K-9의 별칭 ‘천둥’은 나중에 튀르키예와 인도에서도 사용됐다. 튀르키예는 기술 라이선스 수출 방식으로 현지 개발 생산한 K-9의 파생제품에 폭풍 또는 천둥이라는 뜻의 ‘프르트나’라는 이름을 붙였다. 인도에서는 현지 생산한 K-9에 힌두어로 천둥을 의미하는 ‘바지라’라는 이름을 붙였다. 호주에서 생산하는 호주형 K-9은 덩치가 큰 거미라는 뜻의 ‘헌츠맨(Huntsman)’, 핀란드에서는 북유럽 전통 무기인 ‘무카리’로 명명했다. 무카리는 슬레지 해머(대형 망치)를 의미하는 단어로, 일본말로 하면 ‘오함마’쯤 된다.
K-9은 모델번호다. 모델번호는 통상 ‘영문부호+숫자’로 구성한다. 1998년 합참이 ‘전투용 적합’ 판정을 내리면서 K-9이란 모델번호를 부여했다. 이전까지 모델번호는 시제품의 테스트 단계에서 붙인 XK-9이었다. K-9 앞에 붙은 ‘X’는 시제(experimental)를 의미한다.
XK-9이란 모델번호가 탄생한 것은 ADD에서 실시한 시제품 테스트 단계였다. K는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대한민국’을 의미하는 영문명 ‘Korea’의 머리글자다. 통상적으로 국내 독자 기술력으로 개발한 무기에 붙이는 알파벳이다. XK-9에서 ‘나인(9)’은 총기·화력무기 시리즈의 9번째 제품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7번째 제품이다. ADD 개발팀은 당시 모델번호가 비어 있던 ‘K-7’과 ‘K-8’을 건너뛰고 한 자리 숫자 단위에서는 가장 높은 K-9을 선택했다. ‘9’란 숫자를 선택해 1990년대에 반드시 신형 자주포를 전력화하겠다는 연구진의 의지가 담겼다. 일부에서는 가장 높은 숫자인 ‘9’를 선택해 최고의 자주포라는 자신감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한다.
자주포는 외관상으로는 기동무기인 전차와 비슷하지만 ‘출생 족보’가 다르다. K-9의 족보는 화력무기 계열이다. K-9에 앞서 국내에서 개발돼 전력화한 화력장비 시리즈로는 K-1 기관단총, K-2 소총, K-3 경기관총, K-4 고속유탄발사기, K-5 권총, K-6 중기관총 등이 있다. 사람의 가문이나 문중으로 비유하자면 K-9의 덩치는 전차만큼 크지만, 권총이나 소총의 동생뻘이다. K-10은 K-9 자주포에 포탄과 장약을 보급해주는 장갑차를 말한다. K-7 소음기관단총은 K-9이 개발되고 난 2003년에 출시됐다. K-8은 아직 이름의 주인을 찾지 못했다.
ADD가 K-9에 155㎜·52구경장의 포신을 채택한 것은 국제간 탄약 호환성을 고려한 결정이었다. 이는 개발 초기부터 국제탄도협정을 적용함으로써 수출이 가능토록 고려한 조치였다. 그 결과 자주포 수출 시장에서 K-9은 점유율 세계 1위를 차지했다. 국제 무기 시장에서 K방산이 K-9 붐을 타고 마이너리그를 벗어났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다.
K-9은 경쟁 제품보다 가성비가 좋은 점도 있지만, 북한과 오랜 대치상황에서 실전 운용을 통해 성능과 안정성이 검증됐다는 점이 수출에 큰 몫을 했다. 루마니아 수출까지 이뤄지면 K-9 자주포의 누적 수출금액은 13조원을 넘게 된다.
<박성진 ‘안보22’ 대표·전 경향신문 안보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