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일기’를 다시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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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진수 편집장

홍진수 편집장

<전원일기>란 드라마를 기억하시나요. 문화방송(MBC)이 1980년부터 2002년까지 22년간 방송한 역대 최장수 드라마입니다. 농촌의 일상을 잔잔하고 따뜻하게 그려 많은 사랑을 받았고, 저도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몇 년 전 케이블 채널이 재방송하는 <전원일기>를 보다 깜짝 놀랐습니다.

당시 본 에피소드는 총 1088회의 <전원일기> 중 206회인 ‘춤바람’ 편인데 대략적인 내용은 이렇습니다. 영남 엄마(고두심 분)와 종기 엄마(이수나 분) 등 동네 여성 4명이 온천을 다녀옵니다. 읍내에서 점심을 먹고도 시간이 남으니 종기 엄마가 일행에게 솔깃한 제안을 합니다. 읍내에 ‘재밌는 가게’가 있는데 함께 구경을 하러 가자는 것입니다. 그 재밌는 가게의 이름은 ‘은하수 캬바레’입니다. 영남 엄마는 들어갔다가 기겁해 집으로 가버리고 나머지 3명은 맥주를 마시며 춤추는 사람들을 구경합니다. 그러다 그만 ‘방앗간 임씨’와 마주칩니다. 여성 3명이 눈감아 달라고 애원했지만, 방앗간 임씨는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곧 남편들의 귀에도 들어갑니다.

이런저런 일들을 거쳐 동네 아주머니들의 춤바람은 촌극으로 끝나는 듯합니다. 영남 엄마는 시어머니(김혜자 분)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았습니다. 영남 아빠(김용건 분)는 풀이 죽은 영남 엄마에게 농담하며 기분을 풀어줍니다. “얼마나 못났으면 춤추자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냐”, “가고 싶으면 또 가도 된다. 다만 은하수는 가지 마라. 거기 주인이 내 친구다”라며 놀립니다.

이렇게 끝났으면 제가 놀랄 일이 없었을 겁니다. 문제는 이 에피소드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카바레에 갔던 여성들이 동네 빨래터에서 다시 만납니다. 종기 엄마와 일행 한 명은 똑같이 오른쪽 눈에 멍이 들어 있습니다. 남편에게 맞았다는 의미죠. 빨래터의 다른 여성들이 이들을 보고 키득거립니다. 종기 엄마와 일행도 달걀로 눈을 문지르며 웃습니다. 그리고 잔잔한 음악이 나오면서 끝납니다.

이 에피소드가 1985년에 만들어졌다는 점을 고려해야겠죠. 또한 불과 39년 전에 여성이 한국사회에서 어떤 취급을 받고 있었는지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1980년대부터 여성단체 등이 가정폭력을 중대한 인권침해로 인식시킨 덕분에 1997년 가정폭력처벌법이 제정되고 1998년 시행됩니다. 지금은 아무도 가정폭력을 웃고 넘어갈 만한 일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제 여성들은 안전해졌을까요. 한국여성의전화가 언론 보도를 근거로 집계한 자료를 보면 지난해 ‘친밀한 관계의 남성 파트너’에게 살해당한 여성은 ‘최소’ 138명입니다. 살인미수로 살아남은 여성은 311명입니다. 언론이 보도하지 않은 사건도 있을 테니 피해자는 더 많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정폭력과 달리 교제폭력은 아직 사각지대에 있습니다. 교제폭력의 법적 정의도 없습니다.

주간경향 이번 호는 표지 이야기로 교제폭력을 다룹니다. 교제폭력을 신고했다가 무고죄로 기소당한 피해자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교제폭력 근절 논의가 어디까지 와 있는지도 다시 한번 짚어봅니다. 아직 갈 길이 멉니다.

<홍진수 편집장 soo4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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