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제재는 정의로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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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진수 편집장

홍진수 편집장

가끔 답답할 때 찾아보는 ‘사이다 영상’이 있습니다. 20년 전 개봉한 류승완 감독의 영화 <아라한 장풍 대작전>의 한 대목인데요, 온라인 검색사이트에서 ‘아라한 장풍 대작전 명장면’으로 검색하면 최상단에 나오곤 합니다. 이 영화에서 남자주인공은 정의감은 있지만, 힘은 약합니다. 경찰인데도 조직폭력배들에게 모욕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우연히 무도를 익히고 그 조직폭력배들을 식당에서 다시 만납니다. 주인공을 깔보고 또 시비를 거는 조직폭력배와 싸움이 붙고 이번에는 힘껏 응징합니다.

주인공이 악당에게 당했던 것보다 더 강하게 폭력을 되돌려 줄 때 사이다 같은 쾌감을 느낍니다. 동영상 조회수를 보면 저 말고도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좋아하는 이유도 저와 아주 다르지 않을 듯하고요.

세상이 정의롭지 않다고 생각할 때마다 많은 사람이 비슷한 상상을 하는 모양입니다. 법이란 공적 시스템을 통하지 않고 사적으로 악을 징벌하는 내용의 콘텐츠가 꾸준히 나오고, 큰 인기를 끕니다. 2022~2023년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드라마 <더 글로리>의 주인공은 학교폭력으로 영혼까지 잃었고, 남은 인생을 복수를 위해 살아갑니다. 지난해 디즈니플러스가 공개한 드라마 <비질란테>(Vigilante)는 제목부터 ‘자경단’이란 뜻입니다. 웹툰 원작의 이 드라마에서 주인공은 낮에는 법을 수호하는 경찰대생으로, 밤이면 법망을 피한 범죄자를 직접 심판하는 ‘비질란테’로 삽니다. 2021년 방송한 SBS 드라마 <모범택시>는 큰 성공을 거두면서 시즌2가 나왔고, 시즌3도 예정돼 있습니다. 억울하지만 힘이 없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피해자를 대신해 가해자를 찾아 응징하는 무리가 주인공입니다.

만화 속 또는 영상 속에는 ‘사이다’만 있습니다. 주인공의 범법행위를 추격하는 경찰이나 검사가 가끔 나오지만 보통 무기력합니다. 때로는 주인공의 ‘대의’에 공감해 동조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주인공이 정의를 실현하는 데 큰 장애물은 없습니다. 그래야 독자나 시청자가 만족할 테니까요.

현실은 다릅니다. 세상은 그렇게 ‘영화처럼’ 돌아가지 않습니다. 피해자나 가해자나 독자들이 바라는 전형적인 삶을 살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사적 제재로 정의를 실현한다는 것은 망상에 가깝습니다.

주간경향 이번 호는 최근 논란이 되는 밀양 성폭력 사건 사적 제재를 면밀하게 들여다봅니다. 이른바 밀양 사건 사적 제재의 특징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뒤 여러 질문을 던져보려 합니다. 피해자의 의사에 반하는 폭로로 되살아나는 이른바 ‘정의’는 실제로 정의로울까요. 가해자의 신상은 국민의 알권리 영역에 들어갈까요. 시스템을 손보지 않고 가해자만 응징하는 사적 제재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일부 대중은 왜 여기에 열광할까요. 질문만으로도 벌써 머리가 아픕니다. 그러나 사이다만 마시며 세상을 살 수는 없습니다. 그게 현실입니다.

<홍진수 편집장 soo4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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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최정예 겁쟁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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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전범의 아들 노다 마사아키가 쓴 <전쟁과 죄책>에는 포로의 목을 베라는 상관의 명령을 거부한 병사의 이야기가 나온다. 일본 관동군 중대장으로 근무했던 도미나가 쇼조의 증언에 따르면 중국 후베이성에서 포로를 베는 ‘담력’ 교육 도중 한 초년 병사가 “불교도로서 할 수 없습니다”라며 명령을 거부했다. 불교도로서 ‘살생하지 말라’는 계율을 지키려 했던 이 병사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홀로코스트 연구자 크리스토퍼 R. 브라우닝이 쓴 <아주 평범한 사람들>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학살 임무를 거부하고 총기를 반납한 나치 대원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독일 101예비경찰대대 빌헬름 프라프 대대장은 유대인 학살 임무에 투입되기 직전 병사들에게 “임무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면 앞으로 나오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10명 남짓 병사가 앞으로 나왔고, 그들은 소총을 반납하고 대기했다. 그 병사들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각 부대에서 학살 임무를 거부한 병사와 장교들이 속출했지만, 나치 독일의 가혹했던 군형법은 이들에게 명령불복종죄를 비롯한 어떠한 형사처벌이나 징계도 내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