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 난 기타, 전설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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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리스트 개리 무어가 ‘그리니(Greeny)’ 기타를 연주하고 있다. 게티이미지

기타리스트 개리 무어가 ‘그리니(Greeny)’ 기타를 연주하고 있다. 게티이미지

어떤 악기들은 연주자만큼이나 유명하다. 내가 즐겨 듣는 록 음악에도 전설이 된 기타가 여럿 있다. ‘그리니(Greeny)’란 별명을 가진 1959년제 일렉트릭 기타도 그중 하나다. 플리트우드 맥의 피터 그린과 ‘기타의 신’ 개리 무어를 거쳐 지금은 메탈리카의 커크 해밋이 소유하고 있다. 블루스 록 팬들은 그리니를 성배(聖杯)로 숭배하는데, 사실 그리니는 불량품이다.

알려진 정보를 종합하면 이렇다. 1960년대의 어느 날 피터 그린은 런던의 한 악기 수리점에 그리니의 픽업(기타 줄의 소리를 잡아 앰프로 보내는 부품) 수리를 맡겼다. 작은 마이크인 픽업은 일렉트릭 기타의 소리를 결정하는 핵심 부품이다. 문제는 수리공이 픽업 수리를 잘 몰랐다는 데 있었다.

수리공이 수리를 잘못하는 바람에 그리니의 소리는 달라져 버렸다. 픽업의 전기 신호가 어딘가 어긋난 것이다. 픽업을 뒤집어 부착해봐도 그리니의 소리는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피터 그린은 그냥 픽업을 반대로 끼운 채 그리니를 계속 사용했다.

그런데 이 불량 픽업의 소리가 너무 독특하고 아름다웠다. 고음역대가 강조되고 묘한 배음이 섞이며 그리니만의 달콤한 음색이 만들어졌다. 당대는 물론 지금도 다른 기타는 낼 수 없는 소리다. 그리니의 숨결은 개리 무어가 남긴 불후의 기타 명곡 ‘Parisienne Walkways’, 플리트우드 맥의 ‘Black Magic Woman’ 등에서 느낄 수 있다.

‘전설이 된 불량품’ 그리니의 따뜻한 음색이 가끔 위로처럼 들릴 때가 있다. 나다운 그 무엇을 원하면서도 남들과 다르지 않을까 자주 전전긍긍했다. 후배들과의 술자리에서는 ‘삶에는 정답이 없다’며 잔 부딪히고, 다음날 해가 뜨면 세상이 써놓은 정답지를 슬쩍슬쩍 훔쳐봤다. 결정적인 갈림길마다 진짜 내 안의 목소리에 충실한 선택을 했던 기억은 많지 않다.

나뿐만이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표준적인 삶의 경로를 따라야 한다는 압력이 큰 한국사회에서 생은 자주 퀘스트(임무)가 된다. 몇 살에는 뭘 해야 하고, 이때쯤엔 뭘 이뤄야 하고…. 물론 그런 삶이 틀렸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밖의 다른 삶을 ‘틀린 것’으로 만드는 사회적 압력은 분명 다른 문제다. 레벨마다 올려야 할 스킬(기술)과 능력치를 정확히 제시하는 ‘게임 캐릭터 육성법’은 한국사회에서 거대하게 재현된다. 경로 이탈의 공포는 납덩이처럼 무겁다.

‘불량품’ 그리니가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자기만의 음색을 마음껏 뽐낼 수 있었을까. 불량 픽업을 서둘러 교체하거나 내내 부끄러워하며 살지 않았을까. 모난 돌은 정 맞고 못난 돌은 가라앉는 사회에서 ‘너답게 살아!’라는 말은 때로 가혹하기까지 하다.

우리는 모두 나답게 행복하고 싶어하는 존재다. 그리니는 그리니대로, 나는 나대로. 그리니처럼 ‘전설’이 되지 않더라도 그저 나대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아름답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다. 어쩌면 그곳이 지렛대의 힘점일지도 모른다. 거기서 시작해보고 싶다. 더 많이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를 우리이지 못하게 짓누르는 것이 무엇이고, 누구인지를. 애쓰지 않아도 사랑받는 꿈을.

<조해람 기자 lenn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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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의 역경루
오늘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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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손찬은 중국 후한 말 북방민족들이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 정도로 위세를 떨쳤던 화북의 군벌이다. 오늘날 베이징 근처 유주를 근거지로 세력을 키웠던 공손찬은 백마의종이라는 막강한 기병대를 중심으로 황건적과 만리장성 넘어 이민족들을 토벌하며 군세를 넓혀갔다. 탁월한 군사적 재능을 갖췄으나 성품이 포악했던 공손찬은 폭정을 일삼으며 민심을 크게 잃는다. 왕찬이 기록한 <한말영웅기(漢末英雄記)>에 의하면 공손찬은 자신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본다는 이유로 부하를 죽이는가 하면 유능한 관료들을 쫓아내고 점쟁이를 측근에 등용하는 등 막장 행각을 벌였다. 하루는 백성들 사이에서 덕망 높았던 관리 유우를 저자에 세워놓고 ‘네가 천자가 될 인물이라면 비가 내릴 것이다’라고 말한 뒤 비가 내리지 않자 그 자리에서 죽여버렸다. 분개한 수만의 유주 백성들은 유우의 아들과 합세해 공손찬을 공격했고, 라이벌 원소와 이민족들까지 연합해 공격하니 공손찬은 고립무원에 처한다. 사방이 포위된 공손찬은 기주 역현에 거대한 요새를 짓고 농성에 들어가니 이 요새가 역경성이다. 자신의 남은 전력을 요새 건설에 쏟아부은 공손찬은 “300만석의 양곡을 다 먹고 나면 천하정세가 달라질 것이다”라고 말하고 외부와 연락을 끊은 채 향락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