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나는 2인자로 살기로 했다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나는 날 때부터 2인자였다. 위로 형이 있고, 동생이 둘 있는 집안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차남의 특징이 있다. 형보다 잘하기 위해 형을 흉내 내고 형에게 배운다. 나도 그러면서 자랐다. 결혼해서도 나는 2인자였다. 40년 가까이 아내가 모든 결정권을 쥐고 1인자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직장생활 역시 대부분을 1인자를 모시는 비서실에서 했다.

2인자는 1등이 아닌 2등이다. 2등이란 자리는 늘 안타깝다. 동메달을 딴 사람보다 은메달 딴 사람의 마음고생이 크다고 하지 않던가. 정상 코앞에서 좌절하는 게 2등의 자리다. 2등은 또한 1등의 견제 대상이 되기도 한다. 눈치가 빨라야 버틸 수 있는 자리다. 1인자 비위도 맞춰줘야 하고, 아랫사람의 눈치도 봐야 한다. 이 두 가지를 다 잘해야 2인자 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

2인자는 여러 유형이 있다. 실력으로 2인자 자리까지 올라온 사람이 있고, 1인자와의 관계로 자리를 꿰찬 사람도 있다. 또 1인자를 만든 2인자도 있다. 1인자와 동지 같은 관계도 있고, 1인자를 하늘같이 떠받드는 2인자도 있다. 내가 세 분의 회장을 모시면서 지켜본 2인자의 유형은 네 가지다. 그 하나는 1인자에 빌붙어 입속의 혀처럼 사는 사람. 1인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안하무인이다. 이런 유형은 오래 가지 못한다고들 하지만, 실제는 이런 사람이 오래 버틴다.

두 번째는 아랫사람의 인기를 갈구하며 그것에 기대 살아가는 사람. 아랫사람과 윗사람 사이를 줄타기하며 사는 사람은 금세 정체가 탄로 나 단명할 것 같지만, 이 또한 그렇지 않다. 아랫사람과 힘을 합쳐 좋은 실적을 내며 비교적 장수한다. 1인자가 이 모든 정황을 알고 있지만, 자신의 이익에 반하지 않아 눈감아주기 때문이다.

이 밖에 1인자와 구성원 모두에게 인정받으려 하는 사람과 1인자와 구성원보다는 자신의 기준과 원칙을 우선해 사는 유형이 있지만, 두 유형 모두 오래 가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

2인자는 1인자를 만들어주는 사람

2인자에게는 주어진 역할이 있다. 무엇보다, 1인자를 돋보이게 한다. 2인자가 없으면 1인자도 없다. 진정한 2인자는 1인자를 만들어주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만이 ‘2인자’란 본연의 의미로 불리게 된다.

1인자의 의중을 파악해 아래에 전파하는 역할도 해야 한다. 1인자가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아니 내고 싶지 않은 말을 아래에 할 수 있어야 한다. 때로는 1인자 대신 총대를 메야 한다. 피는 자기 손에 묻히고, 1인자는 칭송을 들으며 우아하게 살 수 있도록 만드는 게 2인자의 역할이다.

1인자에게도 고충과 애로가 많다. 1인자는 늘 자신이 잘하고 있는지 불안하다. 아랫사람들에 대한 불만도 크다. 무엇보다 외롭다. 누군가는 이런 1인자의 심기를 관리해줘야 한다. 불평을 들어주고, 고충에 공감해주고, 같이 아랫사람들 욕도 하면서 입에 발린 말로 1인자의 사기를 북돋워 줘야 한다. 이 모든 걸 수행하고 잘하는 사람이 실질적인 2인자다.

2인자는 1인자에게 쓴소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이 시키는 일만 할 때 2인자는 이런 일을 하자고, 이런 일은 해선 안 된다고 직언할 수 있어야 한다. 직언은 자기 자리가 굳건할 때 가능하다. 입바른 소리를 할 수 있을 만큼, 윗사람 신임을 얻고 있어야 한다. 그런 신뢰를 바탕으로 1인자에게 아이디어를 주고 의견을 내는 참모 역할을 다해야 한다. 2인자는 1인자보다 부담을 덜 느끼기에 장기 둘 때 훈수 두는 사람처럼 수가 잘 보인다. 그런 안목으로 1인자를 보좌해야 한다.

아랫사람들의 생각과 민원을 가감 없이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아랫사람에게도 인정받는 2인자가 될 수 있다. 2인자는 모두를 따뜻하게 감싸 안고 아우르는 역할을 해야 한다. 1인자가 휩쓸고 간 자리에 남는 상처를 위로하고 치유하는 역할이 2인자의 몫이다.

1인자의 방패 역할도 한다. 2인자가 무서워 감히 1인자를 넘보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1인자의 경쟁자로서 메기 역할도 해야 한다. 정어리가 가득 담긴 수조에 메기를 넣으면 생존을 위해 힘껏 헤엄치듯이, 메기처럼 1인자를 자극해 안주하지 못하게 만드는 역할도 해야 한다.

ⓒMarco Bianchetti, Unsplash

ⓒMarco Bianchetti, Unsplash

역심 품지 말고 귀는 있되 입은 없어야

이런 역할을 다하기 위해 2인자는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하는가. 무엇보다 역심을 품어선 안 된다. 1인자 자리를 넘보지 않아야 한다. 1인자와 2인자는 1등과 2등의 관계가 아니다. 2인자가 1인자에 비해 열등하거나 모자란 것도 아니다. 다른 역할을 부여받고 있을 뿐이다. 2인자는 자신을 2인자로 인식해야 한다. 한없이 자신을 낮추고 절제해야 한다. 2인자를 1인자가 되기 위해 거쳐 가는 자리로 생각해서도 안 된다. 2인자 자리에 정착해서 자신의 역할을 찾아야 한다.

귀는 있되 입은 없어야 한다. 2인자는 1인자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이지 자기가 말하는 사람이 아니다. 모든 빛은 1인자에게만 집중돼야 한다. 자신이 한 일도 자기가 했다고 하면 안 된다. 자신이 1인자를 빛내주는 2인자인지, 흠집을 내는 2인자인지를 생각하며, 모든 공은 1인자에게 돌리고 과는 자신이 떠안는다는 생각으로 살면 반드시 성공한다.

2인자는 1인자보다 더 잘 알아야 한다. 1인자가 물으면 답해야 한다. 따라서 공부해야 한다. 실력이 있되 1인자보다 더 있는 것처럼 보여서도 안 된다. 그 이상의 실력이 있더라도 1인자나 다른 사람이 그 실력을 알지 못하게 해야 한다. 1인자의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는 순간, 2인자 생명은 끝이 난다.

당연한 얘기지만 특권을 요구하거나 기대해선 안 된다. 아울러 1인자의 이름을 빌려 허세를 부리면서 자신의 이익을 취해서도 안 된다. 1인자도 그런 2인자의 전횡을 감싸고 묵인해선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그런 2인자를 ‘복심’, ‘가신’, ‘측근’이라 칭하며 경계하고 경멸한다. 2인자가 제 역할을 다할 수 없게 된다.

2인자도 1인자를 잘 만나야 한다. 2인자를 키우는 1인자는 포용력과 여유가 있는 사람이다. 한마디로 품이 넓어야 한다. 쓴소리도 들을 줄 알고 자신과 다른 생각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자잘한 일까지 챙기는 1인자 아래서는 2인자가 움직일 공간이 없다. 2인자가 자신을 대신해 역할을 잘할 수 있도록 권위도 세워줘야 한다.

나는 2인자가 좋다. 2인자는 책임에서 자유롭다. 1인자라는 보호막이 있어 위험에 노출되지 않는다. 자리를 탐내지 않고, 1인자에게 밉보이지만 않으면 위태롭지 않다. 그 뒤에 숨어 있으면 된다. 그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은 정서적으로 2인자 쪽에 가까워, 2인자에게 응원을 보낸다. 2인자는 많은 사람을 아군으로 두고 사는 셈이다. 2인자를 자임하고, 2인자로서 누리는 혜택을 만끽해온 대표적 인물이 개그맨 박명수씨다. 자신을 1.5인자, ‘쩜5’라고 하면서 말이다.

2인자에게는 희망도 있다. 언젠가 올 수도 있는 1인자의 가능성을 품고 산다. 그날을 기다리는 설렘이 있다. 누구나 1인자가 되기 위해서는 2인자 자리를 거쳐야 한다. 2인자 과정 없이 된 1인자는 모래 위에 쌓은 성과 같다. 모든 1인자는 탄탄한 2인자 수업을 거친 사람이다.

사람이 모인 곳에는 1인자와 2인자가 있게 마련이다. 보스에게만 2인자가 필요한 게 아니다. 누구에게나 2인자가 절실하다. 또한 훌륭한 1인자 뒤에는 반드시 탁월한 2인자가 있다. 그만큼 2인자 역할은 소중하다. 나는 오늘도 그런 2인자를 꿈꾼다.

<강원국 작가>

요즘 어른의 관계 맺기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