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좋은 관계를 만드는 마법, 경청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Photo by Priscilla Du Preez 🇨🇦 on Unsplash

Photo by Priscilla Du Preez 🇨🇦 on Unsplash

“어떻게 청와대에 가서 일하게 됐어요? 특별한 재능이 있으신가, 그 비결이 궁금해요.” 강의에 가서, 혹은 방송 인터뷰를 하면 자주 듣는 질문이다. 내 대답은 한결같다. ‘관계가 좋아서요’다. 생각해 보면 모든 건 관계였다. 1982년 이른 봄, 이불 보따리 하나 둘러메고 상경할 때 서울 천지에 내가 아는 사람은 10명이 채 되지 않았다. 버스를 타고 남산 1호 터널을 통과하면서 마음이 알싸했다. 그것은 부푼 기대가 아니었다. ‘이 바닥에서 생존할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이었다. 그로부터 20년이 채 지나지 않아 나는 대한민국 최고의 권부에 당당히 입성했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것은 누군가가 나를 소개하고 추천한 덕분이다.

그들은 왜 나를 천거했을까. 사람을 소개하려면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자칫하면 욕먹을 수 있다. 그런 위험 부담을 안고 누군가를 추천하려면 적어도 자신이 손해 볼 일은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런 확신은 어디서 오는가. 자기가 경험해본 데서 찾을 수밖에 없다. 그 사람들은 나를 경험하면서 도대체 어떤 역량을 확인한 것인가. 아마도 경청하는 태도가 아니었을까. 자기들 말을 잘 들으려고 노력하는 나의 자세를 인정해준 것이지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자기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는 법이니까.

인정받고, 배우겠다는 의지를 담은 경청

‘말을 잘 듣는다’라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건 바로 상대 비위를 잘 맞춘다는 의미다. 말을 잘 듣는다는 것은 싫은 걸 잘 참고 아니꼽고 치사한 꼴을 잘 견뎌낸다는 뜻이다. 싫은 내색을 보이거나 불끈불끈하지 않고 고분고분 시키는 일을 잘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잘했어’ 하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직장 다닐 적엔 물론 지금도 ‘싫어요’는 내게 금기어에 가깝다. 직장 다닐 적 싫은 걸 싫다고 하지 못한 버릇이 여전히 남아 있어, 아내에게 그 어떤 반항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가기 싫은 강의도, 쓰기 싫은 추천사 제안도 좀체 거절하지 못한다.

‘말을 잘 듣는다’라는 건 어떻게든 인정을 받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상대 말을 잘 들어야 그가 내게 무엇을 원하고 기대하는지 알 수 있고, 그걸 알아야 기대에 부응할 수 있으며, 요구나 기대 따위를 좇아서 응하면 인정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따라서 그 사람의 필요가 무엇인지, 내가 어떻게 해야 그 사람 마음에 들 수 있는지 알아내 그걸 실행한다. 알아내기 위해서는 말하지 않는 것을 유추해서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잘 듣지 않고 그걸 알아낼 방법은 없다.

나는 직장 상사가 바뀌거나 내가 자리를 옮겨 새로운 상사를 만났을 때 최대한 빨리 상사의 취향이나 성향을 파악해 맞추려 노력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나같이 적극적으로 상사를 파악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상사가 알려주면 하나씩 하나씩 알아가는 방식을 취했다. 그때그때 꾸중을 들으면서 조금씩 알아갔다. 문제는 이제 좀 알 만하면 헤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시행착오를 했으면 그다음 상사는 조기에 성향을 파악하려 해야 할 텐데, 그렇게 하지 않고 대부분 전철을 밟는다.

나아가 ‘말을 잘 듣는다’라는 뜻은 말하는 사람을 본받고 싶다는 표현이기도 하다. 나는 누군가의 말을 들으면서 그 사람에게서 내가 배울 만한 장점을 찾는다. 지금까지 만나본 사람 중에 배울 게 없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사람에게 배우기 위해 나름의 원칙을 지킨다. 누군가를 만나면 그 사람에게 뭐라도 한 가지는 배우겠다는 목표를 세우는 게 첫 번째 원칙이다.

잘 듣는 사람이 인생을 바꿀 수 있다

두 번째, 그러기 위해 나는 사람을 만나기 전, 그 사람에 대한 선입견을 갖지 않으려 애쓴다. 대신 처음 만나는 사람이면 그 사람을 공부한다. 내가 직접 만나지 않고 들은 그 사람에 대한 평판이나 인상은 막상 만나고 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선입견을 갖고 닫힌 마음으로 만나면 그 사람의 장점을 발견하기 어렵다. 마음을 활짝 열고 만나야 한다.

그 연장선에서 세 번째 원칙은 차등을 두지 않는 것이다. 사람을 차별 대우하면 진짜 배워야 할 것을 놓칠 확률이 높다. 내 경험에서 보면 대접받고 사는 사람보다는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배울 점이 더 많기 때문이다. 마지막 원칙은 만난 사람을 험담하지 않는 것이다. 굳이 흠을 말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그걸 말하지 않았다고 정직하지 못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나는 무조건 칭찬만 한다. 들은 얘기도 그에게 보탬이 되지 않는 얘기는 옮기지 않는다. 그게 나를 만나준 사람에 대한 의리요, 최소한의 예의다.

나만 남의 말을 잘 들어준 건 아니다. 내 말을 잘 들어준 사람도 많았다. 그런 사람 덕분에 잘 살아올 수 있었다. 그중 가장 고마운 사람이 아내다. 아내는 늘 내게 말할 기회를 준다. 그래서 나는 마음껏 말할 수 있다. 아내는 또한 듣고 칭찬해준다. 내 말에 자신감이 붙는다. 아내는 또한 묻는다. 답하다 보면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알 수 있다. 나는 아내에게 말하면서 좋은 생각이 떠오른다. 생각도 정리된다. 그렇게 정리된 생각을 글로 쓴다. 아내는 내가 방송에 나가 한 말에 피드백도 해주고 조언도 한다. 나는 아내의 말은 그 누구 말보다 귀담아듣는다. 가끔은 송곳같이 내 폐부를 찌르기도 하지만, 그 말에 아파하지 않는다. 그게 진심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잘 듣는 사람에게는 인생의 향배를 바꾼 한마디가 있다. 재심 전문 변호로 유명한 박준영 변호사에게도 그 한마디가 있다. 중학교 2학년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한 “공부 열심히 하고 말 잘 들으면 도와주는 사람이 있을 거다”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군에 가서 배 병장이란 사람을 만났는데, 사법고시를 준비하다 입대한 그 사람의 도움으로 수렁에 빠져 있던 자기 인생을 건져 올릴 수 있었다.

통섭학자 최재천 선생도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교에 다닐 때 고마운 미국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가 “해보기 전까진 알 수 없어(You never know until you try)”라고 말해줬고, 이 말에 용기를 얻은 최 선생은 하버드대학교 윌슨 교수에게 편지를 써서 하버드에 공부하러 가게 됐다. 그 친구가 “어떻게 감히 세계적인 석학에게 편지 쓸 생각을 했느냐”고 물었고, 최 선생은 “네가 그러라고 하지 않았냐”고 되물었다. 최 선생은 그저 흘려들을 수 있었던 그 한마디에 반응하는 사람이었다. 유시민 작가도 마찬가지다.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의 한마디 “그냥 바보는 괜찮다. 그런데 알지도 못하면서 잘 안다고 믿고 있는 거만한 바보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말에 충격받고 나이 쉰 살에 과학 공부를 시작했다.

내게도 기억나는 한마디가 많이 있다. 초등학교 2학년 어느 날 새벽녘에 들은,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아버지에게 말씀하신 “아이들 공부를 끝까지 시켜 달라”라는 유언, 고등학교 입시에 떨어진 내게 아버지가 하신 한마디. “처칠도 육사를 세 번 떨어졌다.” 이 모든 말이 모여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강원국 작가>

요즘 어른의 관계 맺기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