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초에 히로뽕 유통량의 60~70% 차지했던 거물 중 거물
차명 거래와 힘들수록 사업 더 확장…<범죄도시 3> 모티브 중 하나
피해자 없는 범죄(Victimless crime). 마약이 대표적이다. 신고할 피해자가 없는 범죄 마약은 조용히 사회 곳곳에 퍼져갔다. 남녀노소·사농공상 가리지 않고 마약 투약자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특히 ‘저연령화’가 두드러진다. 가장 보편적인 마약류가 메스암페타민, 즉 히로뽕이다. 온갖 종류의 마약이 우후죽순 퍼져나간 데는 히로뽕이 60여 년 전부터 한국 땅에 중독의 토양을 만들어 놓은 영향이 컸다. 히로뽕 유통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만연한 마약 유통의 문제를 이해하는 출발점이 되는 이유다. 주간경향에서 히로뽕의 역사와 현재 즉 대한민국 ‘뽕의 계보’를 5회에 걸쳐 되짚는다. 직업물 웹소설 및 실화 기획사 팩트스토리와 공동기획했다. <편집자 주>
“마약왕이라 할 만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히로뽕 유통업계의 ‘상선’(총책을 가리키는 은어)으로 꼽히는 이들을 만날 때마다 물었다. ‘마약왕’이란 용어가 조금 유치하다 생각했지만, 누가 히로뽕 계의 가장 큰 거물이고 영향력이 있는지 단번에 파악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답변 중에는 ‘그때그때 다르다’라는 말이 가장 많았다. 한때 대량의 히로뽕을 유통했다 사라진 이들도 있고, 오랜 시간 활동해왔지만 다루는 물량의 변동 폭이 심한 이들도 있었다. ‘마약왕이 검거됐다’라는 언론보도도 대체로 부풀려진 사례가 많았다.
이 세계에서 마약왕이라고 부를 만한 이들은 오랜 세월 교도소와 사회를 오가면서도 명성을 잃지 않는 소수에 불과하다. ‘영원한 마약왕은 없다’라는 게 정답에 가깝다. 한때의 마약왕이 평범한 장사꾼이 되기도 하는 게 이 바닥의 생리였다. 하지만 이런 세계에서도 항상 ‘거물 중의 거물’로 거론되는 이가 있었다. 2000년대부터 알려진 Y였다.
Y는 히로뽕의 세계에 몸담은 이들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이름이라고 한다. 그의 이름을 모른다면 오히려 이 세계에 연륜이 덜 쌓였다고도 할 수 있다. 그는 본명보다 ‘성일’이란 가명으로 유명했다. 그의 가명을 딴 조직 ‘성일파’는 언론에도 여러 번 오르내렸다.
Y는 2000년대 초 전국 히로뽕 유통량의 60~70%를 차지했던 인물이다. 한국이 주요 히로뽕 생산국에서 주요 소비국으로 자리를 바꾸면서 국내 히로뽕 유통업자들은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세계의 공장’으로 불리던 중국이 히로뽕 업계에서도 새로운 공급처가 됐고, 중국에서 대량의 히로뽕을 들여오는 거물급 업자들이 등장했다. Y는 2000년대 초 시장을 장악한 뒤 이후에도 지속해서 명성을 유지한 인물로 꼽힌다.
징역 9년을 선고받아 교도소에 수감 중인 Y와 주로 편지로 대화했고, 한 차례 접견했다. 자타공인 마약왕 중 한 사람이었지만 직접 만난 Y는 동네 사우나에서 만날 법한 평범한 중년 남성이었다.
호기심에 발 디딘 뽕의 세계
대구가 고향인 Y는 1974년부터 경주에 살았다. 타지에 살게 되면서 친구를 따라 가명을 썼다고 했다. Y는 1984년 결혼하는 등 평범한 삶을 살았다. 경주 불국사 인근에서 여관과 기념품 가게를 하면서 도박판도 운영했다. 그러다 예기치 않게 1987년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Y는 히로뽕 투약으로 붙잡혔다 풀려난 후배에게 ‘대체 그게 무엇이냐’고 물었고 후배가 히로뽕을 건넸다. 호기심이 경계심을 허물었다. 그때는 이 히로뽕이 그의 인생을 이전과 전혀 다른 궤도 위에 올려놓을 줄 몰랐다. Y는 그때 이후 투약을 계속했고, 1989년 구속돼 첫 징역을 살았다.
교도소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Y도 수많은 히로뽕 투약자 중 한 사람일 뿐이었다. Y를 마약왕으로 성장시킨 곳은 역설적으로 교도소였다. 감옥은 죄를 처벌하고 잘못을 뉘우치며 사회로부터 범죄자를 격리하기 위한 곳이지만, 히로뽕의 세계에선 인맥을 넓히기 위한 ‘사교의 장’이었다. 전국의 ‘뽕쟁이’들이 교도소에서 안면을 트고, 인사를 하고 안부를 주고받는다. 교도소를 괜히 ‘학교’라고 부르는 게 아니다. 이때의 인연이 히로뽕의 세계에서 높은 곳으로 오르는 데 필수적이다.
Y는 1980년대 활동한 히로뽕 유통의 거물들처럼 일본에서 온 히로뽕 제조 기술자에게 배우거나, 바다를 누비는 밀수선을 타지도 않았다. 대일본 밀수에 종사한 이들을 국내 히로뽕 1세대라고 한다면, Y는 순수 국내파로 성장한 2세대라고 할 수 있다.
히로뽕 사업은 ‘믿을 수 있다고 판단하는 사람과 불법적인 물건을 사고파는 일’이다. 얼굴을 맞대고 서로에 관해 알아가는 것이 그 출발이다. 이때나 지금이나 히로뽕을 사고파는 데 특별한 기술이나 자격이 필요한 게 아니다. 히로뽕 장사에 필요한 단 하나의 요소만 꼽자면 ‘인맥’이다.
Y도 교도소에 들어가서 인맥을 만들었고 출소한 뒤 히로뽕 매매에 뛰어들었다. 교도소에서 만난 이들과 힘을 합쳐 거래를 트고, 지인의 지인을 소개받는 방식으로 발을 넓혔다. 돈만 주고 물건을 못 받는 사기도 당하고, 믿었던 지인에게 배신도 당하면서 Y는 히로뽕 사업의 규칙을 익혀갔다.
1990년대 중·후반 국내 히로뽕 업계는 이전과 본질에서 달라졌다. 우선 히로뽕이 한국의 주류 마약이 됐다. 마약류 사범 중 주로 히로뽕과 관련된 향정(향정신성의약품)사범이 차지하는 비율은 1995년 이후 급속히 증가해 이내 전체 마약류 사범(마약·향정·대마)의 50%를 웃돌기 시작했다. 2001년에는 78.8%를 차지했다.
공급처도 눈에 띄게 달라졌다. 이전까지 국내 유통 히로뽕의 대부분은 국내에서 만들어졌다. 그런데 국내의 히로뽕 제조 공장들이 강력한 단속에 하나둘 문을 닫고 여기에 1992년 한국과 중국이 수교하면서 완전히 다른 길이 열렸다. 중국과 왕래가 자유로워지자 히로뽕 업계에 몸담은 이들은 새로운 기회가 왔음을 바로 알아차렸다. 중국은 히로뽕 제조 원료인 염산에페드린을 만드는 마황을 쉽게 구할 수 있었고, 히로뽕이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아 처벌도, 단속도 거의 없었다.
중국의 한국인들
부활을 꿈꾸던 한국의 히로뽕 기술자들이 중국 동북부로 향했다. 동북부에는 말이 통하는 중국 동포가 많았고, 원재료도 구하기 쉬웠다. 중국에 자리를 잡은 기술자들은 히로뽕을 만들어 한국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히로뽕 생산지이자 수출국이던 한국은 이 무렵부터 히로뽕 수입국이 됐다. 훗날 중국도 그렇지만, 히로뽕 생산국은 결국 소비국이 된다.
2000년대 초가 되자 중국에서도 히로뽕 제조 시설에 대한 단속이 강화됐다. 2001년 9월 한국인 히로뽕 제조업자가 적발돼 사형을 당하기도 했다. 이 일은 외교 문제로 불거졌다. 한국 정부는 중국에 사전 통보 없이 사형을 집행했다며 항의했고, 중국 측은 미리 전달했다고 반박했다. 사형된 신모씨는 1990년대 후반 중국으로 가 히로뽕을 만들어 국내로 밀반입하던 인물이었다. 신씨 외에도 제조 공장을 차려놓고 히로뽕을 만들던 한국인들이 연거푸 중국 공안 당국에 붙잡혔다.
중국에서 직접 히로뽕을 만드는 일의 위험성이 커지던 무렵 ‘북한산 히로뽕’이 시장에 등장했다. 북한산 히로뽕은 북·중 국경을 타고 넘어와 한국인 밀수업자 손을 거친 뒤 한국으로 들어왔다. 중국 남부에서 대만계 폭력조직이 주도해 만든 히로뽕은 가격이 쌌지만 순도가 떨어졌다. 북한산 히로뽕은 조금 비싸도 품질이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중국에 자리 잡은 한국인들은 제조 대신 밀수를 전문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Y도 바로 이때 교도소에서 쌓은 인맥을 통해 중국에서 히로뽕을 건네받는 일에 뛰어들었다. 그는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거래방식도 과감하게 도입했다. 기존 히로뽕 거래에서는 ‘한 손으로 히로뽕을 건네면 다른 손으로 현금을 건넨다’라는 ‘오른손 왼손 거래’가 주였다. 추적을 피하고자 자동차에서 돈을 확인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해 히로뽕을 건네는 ‘차치기’ 도 있었다.
2000년대 들어 새롭게 등장한 것이 차명계좌를 이용한 거래였다. 지금은 불법 거래를 할 때 차명계좌를 이용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당시에는 신종 수법이었다. 중국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한국으로 숨겨 들어온 히로뽕은 운반책인 ‘지게꾼’이나 고속버스 화물 탁송 등을 이용해 한국의 유통업자 손으로 들어갔다. 직접 만나 현금과 히로뽕을 주고받기 어려운 한·중 간 히로뽕 밀수는 차명계좌 수법의 등장으로 보편화했다.
중국을 통한 북한산 히로뽕 밀수와 차명계좌를 사용하는 거래 방식의 변화를 Y는 제대로 포착했다. Y는 대량의 히로뽕을 전국에 빠르게 유통했고 단숨에 전국적인 히로뽕 유통업자가 됐다.
Y가 히로뽕 업계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 주도면밀하게 계획해 마약왕의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다. 선배의 배신으로 Y를 따르던 동생과 친구들이 모두 구속되는 일도 겪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때쯤 조용히 숨어 지내려고 했을 터지만 Y는 ‘이판사판’으로 사업을 더 확장하기로 했다.
Y는 중국에서 밀수업자로 활동하는 친구를 통해 히로뽕 수십㎏을 받아 전국에 유통하기 시작했다. 궁지에 몰리자 평소라면 감당하지 못했을 만한 양을 과감하게 받아 국내에 뿌렸다.
2002년 Y가 검거됐을 때 관련 기사를 보면, Y는 북한산 히로뽕을 약 7개월간 매달 3㎏씩 모두 20여㎏을 들여와 국내에 유통했다. 당시 가격으로 약 700억원 규모였다. 기사에는 ‘정제가 뛰어나고 순도가 매우 높아 중국산이라기보다는 북한산으로 추정된다’라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분석 결과가 소개됐다. 수십 개의 차명계좌도 발견됐다.
당시 서울중앙지검은 집중적인 히로뽕 유통 단속을 해 10개 밀매팀을 적발했다고 발표했다. 이른바 ‘10개 파 사건’이다. 이중에 Y도 포함됐다. 대구 경찰에 붙잡힌 Y는 서울중앙지검으로 이송됐다. 이때를 기점으로 국내 히로뽕 유통량은 크게 줄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증가한다.
대검찰청이 낸 2005년도 마약류 범죄백서를 보면, 향정사범의 수는 2001년 7959명, 2002년 7918명이었다. 10개 파 사건 이후인 2003년 향정사범은 4727명으로 40.3%나 줄었지만, 2004년 5313명으로 바로 반등했고 이후 꾸준히 증가했다.
백서는 “2002년도에 강력한 단속 효과에 힘입어 밀수 등 공급조직 10개 파 224명이 단속됨에 따라 마약류 공급선 차단 등으로 2003년도에 마약류 사범이 급감한 이후 그 여파가 2005년도에도 지속하는 상황”이라면서도 “주종 마약류인 향정사범은 2003년도에 대폭 감소하였으나 2004년도부터 지속해서 증가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적었다.
Y는 이 사건으로 징역 5년 6개월의 실형을 살았다. 현재 기준으로 보면 대량의 히로뽕을 밀매하고도 형량이 크지 않았다.
영화 같은 삶과 현실
Y는 2007년 7월 출소한 뒤에도 히로뽕 판매를 계속한다. 이전과 달리 그의 이름값은 한참 높아져 히로뽕 업계에서 거물급 유통업자로 여겨졌다.
Y는 부산과 울산 등 경남지역 수사기관의 정보원으로도 활동하기도 했다고 직접 밝혔다. 히로뽕 세계의 사건 브로커를 가리키는 이른바 ‘야당’이었다. Y는 야당으로 활동하며 히로뽕 유통을 병행했다. 히로뽕의 세계에서 야당을 겸한 히로뽕 유통업자는 매우 위험한 존재로 인식된다. 야당 중에는 자신도 히로뽕을 팔면서 경쟁자를 수사기관에 제보해 밀어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야당 활동을 한 경력은 히로뽕 유통업계에서 누군가를 배반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당연히 이를 대놓고 드러내지 않는 이가 많다. 하지만 Y는 자신이 히로뽕 사건 수사에 도움을 많이 줬다는 걸 숨기지 않았다. “밀반입 판매자들을 작업해 약 8~10㎏을 압수하도록 작업한 적도 있습니다.”
Y는 2013년부터 한동안 카드 도박판을 운영하기도 했다. 2000년대 초반, 마약왕으로 불렀던 그의 경력과는 조금 맞지 않아 보이지만, 히로뽕 유통을 하는 이들이 다른 사업을 병행하는 일은 흔하다.
Y는 시대의 변화를 제대로 포착해 과감하게 나선 마약왕으로 꼽힌다. 그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세우는 히로뽕 업계 후배도 많다. 하지만 그 역시 사회와 교도소를 오가는 히로뽕 세계의 인과율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Y에 따르면, 그는 2018년 우연찮은 기회로 일본 야쿠자 쪽과 연결됐다. 2018년 7월 대만의 조직에서 일본의 조직으로 넘기기 위해 한국으로 밀반입된 히로뽕 112㎏ 중 22㎏이 Y의 손에 들어왔다.
남은 히로뽕을 판매하려던 대만 조직이 구매처를 수소문하는 과정에서 이들의 계획이 국정원과 서울경찰청 마약범죄수사대에 포착된다. 경찰은 히로뽕을 압수하고 같은 해 11월 20일 부산의 한 호텔에서 Y를 체포했다. 그는 이 일로 징역 9년을 선고받았다.
Y는 기자에게 자신의 글솜씨가 부족하고 접견 시간은 짧으니, 출소 후 만나 경험담을 자세히 들려주겠다고 했다. 그에겐 영화처럼 흥미로운 경험담이 많을 테다. 영화 <범죄도시 3>에는 중국과 일본을 오가는 마약거래상의 이야기가 담겼는데, Y의 사건도 모티브 중 하나로 쓰였다고 한다. 하지만 수감생활은 영화가 아닌 현실이었다. Y는 고희(古稀)를 맞는 2026년이 돼야 만기 출소한다.
<전현진 기자 jjin23@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