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23일 오후 2시. 서울 강북구 오래된 상가 지하 연습실에 비범한 외모의 청년들이 모였다. 근황 인사도 없이 그들은 바로 ‘연극을 왜 하는가?’, ‘관객에게 내 연극을 왜 보여주어야 하는가?’에 대한 토론을 시작했다. 주어진 2시간으로는 턱없이 부족해 예정에 없던 소그룹별 토론도 추가됐다. 연극을 좀 하는 사람, 연극을 좀 하려는 사람들이 모인 ‘프로젝트 3일-그 후 3일’ 포럼 현장이다.
시작은 지난 3월 8일부터 10일까지 3일간 진행된 ‘프로젝트 3일’이다. 강훈구(공놀이클럽), 김수정(극단 신세계), 김정(프로젝트 내친김에), 오세혁(네버엔딩플레이), 정진새(극단 문) 등 6인이 제안하고 함께 이끈 이 ‘연극인 캠프’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모집 공고가 뜨자 몇 시간 만에 120여명이 몰려 조기 마감됐다. “모두의 연극 갈증을 해소하기 위한 3일간의 캠프로 연습이자 토론이자 공연이다. 연극인들이 모여 이틀 밤낮 연습하고 토론해 사흘째 하나의 연극을 무대에 올린다”라는 문구가 이들의 가슴을 뜨겁게 했다.
6명의 제안자가 중지를 모아 진두지휘한다는 것은 연극계에서 ‘사건’에 속한다. 이들은 모두 동아연극상과 서울연극제, 백상예술대상, 대한민국 연극대상 등 국내 유수한 상을 휩쓴 공연계의 블루칩 작가·연출가다. 각자 산적한 프로젝트에 정신없음에도 아무런 대가 없이 3일을 온전히 쏟아붓는 이런 기획을 밤샘 회의하며 만들어낸 이유는 무엇일까? 연출, 배우, 작가 100여명이 깊이 있는 이 캠프에 모인 이유는 또 무엇일까?
그 답은 창작 초연 <찬란하고 찬란한>(이이림 작·연출·작곡·출연) 제작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제작사 램스테이지 이이림 대표는 20년가량 대학로에서 활동한 중견 배우다.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3년째 무대에 서지 못하자 동료들과 고민을 나누고 토론을 거듭하며 배우 중심의 프로젝트팀 ‘창작과 배우’를 결성했다. 연극 <찬란하고 찬란한> 트라이아웃(연습) 공연이 열흘간 전석 매진되자 그는 팀원들과 제작사를 차렸다. 출연 기회를 얻지 못해 고심하던 배우들은 극작과 연출, 작곡, 연기, 기획, 음향 등 역할을 겸하며 작품에 참여했다.
작가가 꿈인 직장인 하루키와 음악인이 꿈인 백수 쇼타는 고교 밴드부 친구로 동거인이다. 어느 날 갑자기 하루키에게 극작 청탁이 들어오고 거절할 틈도 없이 거액의 계약금이 입금된다. 어머니 치매 요양비가 급했던 하루키는 계약금을 써버리고 쇼타와 함께 밴드부 기억을 되살려 극작에 몰두한다. 그 과정에서 잊힌 친구를 기억해낸 이들은 친구 거취를 수소문하며 새 국면에 접어든다. 하루키와 쇼타는 현재에 있는 것일까? 평행세계에서 과거를 답습하는 것일까? 시공간을 넘나드는 이야기 속 이야기에서 이들은 해피엔딩보다 더 심오한,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삶 ‘해핑(happing·현재진행형 행복)’을 새롭게 인식한다.
“낮은 곳에서 진심을 다해 각자의 이야기를 하다 보면 원하는 것을 얻게 된다”는 뮤지컬 <이솝이야기>(서윤미 작·연출·작곡) 역시 같은 맥락이다. 기원전 6세기, 주인 다나에와 노예 티모스는 서로 의지하며 살다가 이별한 후 수많은 난관 속 해후한다. 해님과 바람의 내기, 양치는 소년, 개미와 매미 등 많은 이솝 우화는 이 중심 줄거리에 살을 입히는 풍성한 퍼즐이 된다. 기승전결에 적절히 자리 잡으면서 새로운 교훈을 생성하는 과정에 방점이 있는 작품이다. 수천 년 후 후손들까지 안배한 마무리는 탈무드를 연상케 한다. 그리스 고대 자연으로 돌아간 듯한 영상예술, 스트링이 현란한 라이브 연주는 몇 개의 큐빅으로 구성된 텅 빈 원형 무대를 지혜와 활기의 요람으로 이끈다.
6세기 전 노예 티모스보다 더 비참한 18세기 여성도 있다. 뮤지컬 <여기, 피화당>(김한솔 작·작사, 김진희 작곡, 김은·한유주 연출)의 사대부 여식 가은비, 매화, 몸종 계화는 동굴에 산다. 병자호란에 끌려가 속환 등을 통해 고향에 왔으나 정절을 잃어 집안과 나라에 누가 된다며 내쳐졌다. 생계를 위해 사랑 이야기를 쓰며 연명하던 세 여성은 선비 후향과 몸종 강아지의 응원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담은 ‘박씨부인전’을 공동 집필한다.
본격적인 이야기 속 이야기다. 소외되고 상처받아 소멸하려 했던 이들은 “이야기 속의 나는 용기 있고 강하며 도망 다니지 않는다”고 절규하며 ‘피화당’에서 세상 밖으로 나온다. 동굴을 형상화한 이층 구조의 무대예술이 시대착오적인 여성 도피 서사를 기묘하게 시각화했다. 라이브로 반주하는 대금 등의 한국적 음률이 시대상을 재인식하게 한다. 보이지 않으나 존재함은 알고 있는 동시대 차별에 대한 ‘의표’ 찌르기다.
꿈을 놓지 않도록 염원하는 연대와 간절함은 뮤지컬 <너를 위한 글자>(김한솔 작·작사, 김치영 작곡, 김지호 연출)에도 드러난다. 시력을 잃어가는 친구가 좋아하는 글쓰기를 계속할 수 있도록 타자기를 발명한 19세기 초 이탈리아 발명가 펠레그리노 투리의 실화가 모티브다. 작가 지망생 캐롤리나와 유명한 작가 도미니코, 발명가 투리는 죽마고우다. 캐롤리나를 동시에 사랑하는 도미니코와 투리는 계속 대치하지만, 시력을 잃고 꿈도 잃은 캐롤리나를 보는 것만 한 불행이 없음을 깨닫는다. 둘은 합심해 캐롤리나가 시각장애인이 돼도 글을 쓸 수 있는 방법을 찾고 타자기를 발명한다. 오랜 친구들이 서로에게 꿈이고 희망이 돼가는 과정이다. 각자 이야기 속에 침잠해 있던 이들은 시력 상실이라는 큰 사건을 통해 모두의 이야기로 다시 태어나 더 큰 꿈을 이뤄낸다. ‘너를 위한 글자’는 결국 ‘나를 위한 글자’를 거쳐 ‘모두를 위한 글자’로 확장된다.
뮤지컬 <이솝이야기>에서 토끼와 거북이 우화를 만들어낸 페테고레 할아버지는 “낮은 곳에서 꾸준히 전하는 이야기는 많은 사람의 이야기로 전해져 꼭 가야 할 곳에 가고 만다”는 명언을 남긴다.
연극인 캠프 ‘프로젝트 3일’ 역시 그러하다. 이를 기획한 중진 창작진들과 100여명 참가자 모두가 원하는 것은 바로 연극의 본질을 이해하고 연극 활동이 지속할 수 있도록 이끌어줄 동료들이다. 필자는 ‘프로젝트 3일’ 전 과정에 유일한 영상기록자로 동참했다. 캠프가 끝나고 참가자들의 열망을 이어 ‘프로젝트 3일-그 후 3일’ 포럼을 진행한 김정 연출에게 ‘다음에는 무엇이 가능할지’ 물어보았다. 김정 연출은 “세 번의 추가 포럼을 통해 더욱 구체적인 갈증을 수렴할 수 있다면 모두 함께하는 협력 공연으로 가시화될 가능성도 있다”고 답했다. ‘프로젝트 3일’ 참가자들인 예술가 모두에게 간절한 ‘해핑’이다. 연극 <찬란하고 찬란한>, 뮤지컬 <너를 위한 글자>는 3월 31일까지, 뮤지컬 <이솝이야기>·<여기 피화당>은 4월 14일까지 상연한다.
<이주영 문화칼럼니스트·영상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