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는 많은데 진정한 친구가 없는 사람이 있고, 친구가 아예 없는 사람이 있다. 친구 자체가 없는 사람도 두 갈래다. 자신이 원해서 친구가 없는 사람과 친구는 만들고 싶은데 없는 사람. 그리고 친구가 많진 않은데 진짜 친구가 있는 사람. 이 네 부류를 가르는 요인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편안함’이라고 생각한다. 밥 사주고 부탁도 잘 들어주는데 주변에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이가 있는가 하면, 별로 해주는 것도 없는데 사람이 꼬이는 이가 있다. 또 보면 볼수록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고, 한 번 보면 다시는 만나기 싫은 사람이 있다. 그 차이는 뭘까. 내가 생각하는 것은 바로 편안함이다. 편안해서 자주 만나고 싶은 것이다.
‘편안한’ 사람과 ‘편한’ 사람은 다르다. 아내는 결코 편한 상대는 아니다. 만만치 않다. 하지만 편안한 상대다. 나도 누군가에게 편안한 사람이 되고 싶다. 언제라도 만나면 마음이 편안한 사람이면 좋겠다. 그러나 편한 사람이 되는 건 사양한다. 언제라도 만날 수 있고, 함부로 대해도 되는, 쉬운 사람이 되긴 싫다.
아내가 편안한 이유는 뭘까. 꾸미지 않아도 돼서다. 나를 있는 그대로 보여줘도 되기 때문이다. 연애할 때는 그렇지 않았다. 무엇을 하든 잘 보이고 싶어서 어떻게든 나를 꾸미고 약점은 감추려 했다. 지금은 감출 필요도, 감출 수도 없다. 이제 아내는 나에 대해 모든 걸 안다. 그래서 편안하다.
아내가 편안한 이유가 또 있다. 아내와 나는 서로 거절하는 것에 익숙하다. 마음껏 거절하는 관계다. 나는 원하는 게 있으면 눈치 보지 않고 마구 던져본다. 오늘 점심에는 뭐 먹고 싶다고, 내일은 어디 가자고. 내 원고 좀 봐달라고…. 아내는 그 요구가 맘에 들지 않거나 하기 싫으면 단칼에 거절한다. 그런 아내의 의도를 알고 있는 나는 의기소침하지 않는다.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으므로 나 역시 아내 부탁에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당당하게 거부하고 뿌리친다. 그래도 미안하지 않다. 그러니 뭐든 말해보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요구하는 건 말하는 사람의 자유이고, 들어주고 말고는 듣는 사람의 선택이다. 우리는 이를 존중한다. 들어줄 수 있는 것만 들어줘도 되는 관계는 편안하다.
끝으로, 아내와의 관계가 편안한 이유는 일방적이지 않아서다. 한쪽에서 주기만 하거나 받기만 하는 관계는 불편하다. 그런 관계는 한쪽을 숭고하게 만들거나 다른 쪽을 비참하게 만든다. 숭고함과 비참함 모두, 오래 가지 못한다. 숭고와 비참까진 아니더라도 일방적인 관계는 필연적으로 힘의 불균형 상태를 만든다. 한쪽의 영향력과 발언권이 다른 쪽의 그것을 압도하게 된다. 이런 기울어진 운동장에서는 경기를 지속하기 어렵다. 두세 번 주면 한 번은 돌려받는 관계가 오래도록 이어질 수 있다. 지금은 나 혼자 돈을 벌고 있지만, 아내는 한때 자신이 직장을 다닌 덕분에 내가 자주 일을 그만둘 수 있었다는 사실을 수시로 상기시킨다. 이뿐 아니다. 아내가 장시간 집을 비우면 나는 불편하다. 그 불편함만큼 아내가 평소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아내와 나는 누가 누구를 일방적으로 돕거나, 희생하는 관계가 아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관계다. 그런 균형이 우리 관계를 편안하게 한다.
내 곁에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없는 게 나은 사람이 있다. 바로 불편한 사람이다. 내가 불편을 느끼는 사람은 첫째, 날카롭고 까칠한 사람이다. 똑똑하고 잘난 사람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그렇듯, 부드럽고 무던한 사람이 편안하다. 따뜻하고 겸손한 사람을 만났을 때 편안함을 느낀다. 날카롭고 까칠한 사람, 똑똑하고 잘난 사람은 왠지 나를 평가하고 판단할 것 같아 불안하다. 마치 면접관 앞에 앉아 있는 것처럼 마음이 편치 않다. 편안함은 상대를 대하는 태도와 자세에 달려 있다.
둘째, 불평불만이 많은 사람도 불편하다. 불평불만이 많은 사람은 나에 대한 기대 수준이 높아서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것 같아 불안하다. 하지만 만족하고 감사하는 사람은 매사에 긍정적이다. 다름을 인정하고 다양성을 존중한다. 그런 사람은 자기만 알지 않고, 상대를 배려할 줄 안다. 그래서 편안하다.
셋째, 말을 가려서 해야 하고, 상대 반응에 신경 써야 하는 사람은 편하지 않다. 무슨 얘기든 다 해도 될 것 같은, 고민을 털어놓고 싶은, 저절로 솔직해지게 만드는 사람이 편안하다. 나아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몇 시간이건 함께 있어도 괜찮은 상대가 편안한 사람이다.
넷째, 수준이 너무 높은 사람도 불편하다. 나와 어느 정도 격이 맞아야 편안하다. 빈틈이 없고 완벽한 사람을 만나면 나는 긴장한다. 나도 모르게 잘 보이려고 신경을 쓰고, 겨루려고 해서 피곤하다. 그 위세에 주눅 들기도 한다. 그런 사람보다는 나같이 빈틈이 많고 헐렁해서 만나면 자신감을 얻고 용기가 생기는 사람이 좋다.
누구나 편안한 사람을 곁에 두고 싶어한다. 그러기 위해선 내가 먼저 편안한 사람이 돼야 하고, 내가 편안한 사람이 되려면 내 마음이 편안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스스로와 불화하지 않아야 한다. 나는 이만큼인데 저만큼 되고 싶거나, 몸은 여기에 있는데 마음은 저기에 가 있으면 불편하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내가 만난 사람 가운데 이런 편안함을 가진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모자라거나 부끄러운 모습까지도 인정하고 포용한다. 나는 이렇다, 내가 이렇고, 이게 난데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며 살아간다. 그런 사람은 자기를 비하하거나 우쭐해 하지 않는다. 마음이 요동치지 않는다. 잔잔한 수면과 같이 편안하다.
남에게 크게 기대하지 않는 것도 스스로 편안한 사람의 특징이다. 바라는 게 별로 없으니 실망할 일도 없다. 해주면 감사하고 해주지 않아도 서운하지 않다. 다른 사람에 관심은 갖되 부러워하거나 시기하지 않는다. 그저 감탄하고 칭찬할 따름이다. 그런 사람은 물과 같아서 남을 물들이려고도 하지 않는다. 물처럼 투명하고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상대에 맞춰 자기 모양을 바꿀 줄 아는 유연함이 있다.
모든 사람에게 편안한 사람이 될 필요는 없다. 그런 사람은 그저 ‘편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직장 다닐 적에는 모든 사람에게 편안한 사람이 되고자 했다. 불편한 관계를 견디지 못해 안절부절못했다. 편안함의 기준은 절대적이지 않다. 사람에 따라 상대적이다. 어떤 사람에게 불편한 사람이라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도 불편한 사람이란 법은 없다. 궁합이 안 맞을 뿐이다. 편안한 사람과의 관계를 늘리고 불편한 사람과는 접촉을 줄여야 한다. 가능하면 ‘손절’하는 것도 방법이다. 불편한 관계를 붙들고 이를 바꿔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건 무모할 뿐 아니라 백해무익하다. 그러기엔 인생이 너무 짧다.
쉰 살까지 관계를 늘려왔다. 그 덕분에 잘 살았다. 예순을 넘긴 지금은 관계를 늘리려고 연연하지 않는다. 오히려 관계를 줄여가고 있다. 젊었을 때는 잘나가는 사람과 가깝게 지내고 싶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런 사람은 부담스럽다. 이제는 편안한 사람하고만 만나고 싶다. 선택은 내가 한다. 그래도 될 나이다.
<강원국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