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리나의 쇼케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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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식 ‘토론의 즐거움’ 대표

정주식 ‘토론의 즐거움’ 대표

누가 나를 돼지라고 부른다고 해서 내가 돼지가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스스로 “나는 돼지다”라고 말한다면 나는 돼지가 된다. 철학자 김현경은 정체성 서사의 최종 편집권이 당사자에게 주어진 것이 현대사회의 기본적인 작동원리라고 설명한다. 이 원리에 따르면 자기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뿐이다.

지난달 아이돌 그룹 에스파 멤버 카리나는 연애를 했다는 이유로 팬들에게 자필 사과문을 썼다. 팬들이 카리나를 죄인이라고 비난한다고 해서 카리나가 죄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 비난에서 실제로 드러나는 것은 카리나의 죄악이 아니라 비난하는 사람들의 몰지각함이다. 그러나 카리나가 자기 손으로 죄를 고백하는 사과문을 쓴다면 카리나는 죄인이 된다. 그러니까 카리나를 대중 앞에 죄인으로 만든 것은 몰지각한 팬들이 아니라 자필 사과문을 쓰게 한 소속사다. 카리나의 인격은 팬들의 비난이 아니라 소속사의 개입으로 손상됐다. 팬들의 비상식적인 주장에 동의함으로써 자신들이 소속 가수의 내밀한 감정까지 판매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자필 사과문이 K팝 산업의 관행이 됐다. 연애를 했다고 사과하고, 칼국수를 몰랐다고 사과한다. 그런 일로 죄의식을 느껴야 할 사람은 없다.

카리나는 굴욕적인 사과를 했지만, 기획사는 이 굴욕을 다시 자본과 교환한다. 카리나의 연애-사과 이벤트는 자신들이 무엇을 팔고 있는지를 팬들에게 분명하게 보여준 쇼케이스가 됐다.

BTS의 대성공 이래 K팝 아이돌에게는 팬들과의 상시적 소통 의무가 부과됐다. 멤버들의 24시간이 브이로그화 됐고, 눈빛과 말투 표정 하나하나가 ‘굿즈’(기획 상품)가 됐다. 뒷무대가 사라진 인간은 자연스럽게 타인에게 잠식당한다. 스타의 감정 구매에 익숙해진 팬들은 당당히 소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했고, 시장 밖에서 인간을 볼 줄 아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이 시장의 소비자들은 친밀감과 자본의 등가교환이라는 K팝 산업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 “직접 사과해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하락한 앨범 판매량과 텅 빈 콘서트 좌석을 보게 될 거예요.”(카리나 팬들의 트럭 시위 문구) 팬들이 진짜 원한 것은 ‘진정성’ 같은 흐릿한 목적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소유 관계를 분명히 하는 복종의 의례다. 복종의 수치심은 누가 나를 “X새끼”라고 부를 때가 아니라 내 입으로 “나는 X새끼입니다”를 복창할 때 생겨난다. 죄의식을 허위로 자백하게 하는 K사과문 관행은 학대의 성격을 띤다.

소속사가 스타의 인격을 보호해줄 거라 기대하는 건 무리다. 애초에 스타를 팬덤의 욕망에 맞춰 이상화한 것은 바로 기획사이기 때문이다. 팬덤과 기획사 사이의 이러한 공모는 K팝 산업의 이상이다. 카리나는 굴욕적인 사과를 했지만, 기획사는 이 굴욕을 다시 자본과 교환한다. 카리나의 연애-사과 이벤트는 자신들이 무엇을 팔고 있는지를 팬들에게 분명하게 보여준 쇼케이스가 됐다.

<정주식 ‘토론의 즐거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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