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11일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홍콩 H지수 ELS 검사 결과(잠정) 및 분쟁조정기준(안)’을 직접 발표했다. 홍콩 H지수를 기초자산으로 한 파생금융상품에서 투자 원금이 반 토막 나는 등 대규모 피해가 발생했고, 추가 피해도 우려되는 상황에서 금융감독원이 선제적으로 나서서 현황을 점검하고 분쟁조정기준을 제시한 것 자체는 높게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분쟁조정기준의 내용을 두고는 뒷말이 많다. 금융감독원은 이번 분쟁조정기준이 “판매사 책임과 투자자별 특성을 고려한 투자자 책임을 종합적으로 반영해 결정되도록 정교하고 세밀하게 설계”했다고 강조하지만, 피해자들은 일제히 반발하고 나섰다. 보상비율이 과거 유사사례에 못 미친다는 것이다.
나 역시 금융감독원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이번 분쟁조정기준은 최소한 나를 설득시키지 못했다. 왜 그럴까? (나는 과거나 현재에 ELS나 다른 파생금융상품에 가입한 적이 전혀 없으며 가족 역시 그러하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해 아무런 사적 이해관계가 없다.)
판매 원칙이 복합적으로 훼손된 경우
금융감독원이 발표한 분쟁조정기준은 크게 판매사 요인과 투자자 고려 요소로 구분되고, 판매사 요인은 다시 기본배상비율과 판매사 가중으로 나뉘고, 투자자 고려 요소는 다시 가산 요인과 차감 요인으로 나뉜다. 나는 위 네 가지 세부 요소 중 특히 ‘기본배상비율’과 ‘투자자별 차감 요인’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기본배상비율이란 파생금융상품의 판매자인 금융회사가 일반투자자를 상대할 때 준수해야 할 기본적 원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을 때 그 위반 실태에 따라 손해를 배상해야 할 비율을 말한다. 이번 분쟁조정기준은 판매 원칙 중 특히 적합성(적정성) 원칙, 설명의무, 부당권유 금지 등의 세 가지 원칙의 준수 여부에 집중해 각 원칙의 준수가 미흡할 때 기본배상비율을 20%(부당 권유의 경우에는 25%)로 결정했다.
이중 내가 불편하게 느끼는 부분은 이들 원칙이 개별적으로 훼손된 것이 아니라 복합적으로 훼손된 경우의 기본배상비율이다. 이번에 발표된 배상기준은 판매 원칙이 복수로 훼손된 경우 각 기본배상비율의 합계에서 일정 크기를 감경해 주고 있다. 예를 들어 적합성의 원칙이나 설명의무를 각각 하나만 위반한 경우 기본배상비율은 20%지만, 이 두 가지 원칙을 모두 위반한 경우의 기본배상비율은 40%가 아니라 10%포인트를 감경한 30%로 돼 있다.
흐음. 이게 말이 되는 것일까? 어떤 사람이 각각 개념적으로 구분되는 두 가지 나쁜 일을 했다고 하자. 그럴 때 어떻게 책임을 추궁하는 것이 상식적일까?
“두 가지 나쁜 일을 했다고 각각의 처벌을 다 더하는 것은 말이 안 돼. 이미 한 가지 나쁜 일로 처벌받잖아. 그런데 나쁜 일 하나 더한 것이 뭐가 대수라고 그 처벌을 또다시 더 한단 말인가? 조금 깎아 주는 게 타당하지.” 과연 이런 시각이 정당한 것일까?
오히려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것이 더 상식적 아닐까? “나쁜 일을 하나만 저지르는 것도 모자라서 나쁜 일을 또 저질렀다고? 이거 죄질이 아주 불량하구만. 나쁜 일 하나 저지르는 거야 실수라거나 몰랐다고 봐줄 수도 있겠으나, 나쁜 일을 한꺼번에 여러 개 저지르는 것은 작정하고 덤벼든 것 아닌가? 이런 것은 가중처벌해야 마땅해.” 적어도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렇다면 두 가지 판매 원칙을 한꺼번에 어긴 경우에는 기본배상비율이 최소한 40%를 넘어야 한다. 그리고 세 가지 판매 원칙을 모두 어긴 경우에는 현재 비율인 40%가 아니라 최소 65%(20% 2회·25% 1회)가 돼야 한다.
내가 불편하게 생각하는 두 번째 요소는 ‘투자자별 차감 요인’이다. 이 취지는 ‘투자자가 이 금융투자상품에 대한 경험이나 지식이 풍부하거나 돈을 많이 벌었으니 배상비율을 그에 맞춰 깎자’라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교묘한 논리라서 차분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선 명심해야 할 점은 어떤 투자자가 해당 금융상품을 여러 번 거래했거나 그 상품을 비교적 잘 이해하거나 그 상품 구매를 통해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해도 그 투자자는 계속 ‘일반투자자’라는 점이다. 자기 책임의 원칙을 적용받는 전문투자자와는 달리, 일반투자자는 다양한 판매 준칙을 통해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다.
만일 거래 경험이 많거나 돈을 많이 번 투자자가 보호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된다면 이들은 전문투자자 범주에 포함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이들을 계속 일반 투자자 범주에 포함해 놓은 후, 일반 투자자를 다시 세분해서 그 일부에 대해서는 보호막을 도려내는 행위는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다.
일반 투자자까지 배상비율 차감 대상?
예를 들어 보자. 금융감독원의 설명자료 <별첨 1>의 마지막 장에는 배상비율이 0%인 일반투자자의 사례가 있다. 은행이 설명의무를 지키지 않은 상태로 이 투자자에게 ELS를 판매했는데, 이 투자자는 과거에 ELS 투자를 많이 해본 경험이 있고, 손실도 경험했다. 하지만 돈도 많이 벌었고, 투자 규모도 5000만원을 초과했기 때문에 한 푼도 배상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논거는 이것저것 끌어댔지만 결론은 하나다. “이 투자자는 일반투자자이고, 은행은 설명의무를 위반했지만 손해를 배상할 필요가 없다.” 와우!
설명의무만이 문제가 아니다. 금융감독원의 기준에 따르면 이 일반투자자의 차감 폭은 40%에 달하므로, 적합성의 원칙을 위배(20% 배상)해도 되고 부당권유(25% 배상)를 해도 된다. 심지어 설명의무와 적합성의 원칙을 동시에 위반(30% 배상)해도 배상 책임이 없다. 이 투자자는 무늬만 ‘일반투자자’일 뿐, 금융감독원의 눈에는 사실상 ‘전문투자자’인 것이다.
개별적인 차감 요소가 과연 타당한 것인지도 의문이다. 과거의 누적이익 규모가 과연 차감 요소가 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은행은 멋모르는 고령의 할아버지를 꾀어 몇 번 투자 경험 만들고 이익 나게 해주면 그다음부터는 불완전 판매해도 된다는 뜻인가? 3000만원을 맡긴 할아버지보다 1억원을 맡긴 할아버지는 덜 보호해도 되는 것일까?
그뿐만 아니라 명시적으로 판매 원칙 준수의 의무를 부담하는 금융회사가 그 원칙을 여러 개 어긴 경우에는 배상비율을 감경해 주고, 보호의 대상인 일반 투자자의 투자 경험이나 누적이익 등 차감 요소는 감경 없이 무조건 단순 합산하는 것이 균형 잡힌 시각인가?
금융소비자보호법 제13조는 “누구든지 이 장의 영업행위 준수사항에 관한 규정을 해석·적용하려는 경우 금융소비자의 권익을 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하고 있다. 누가 법을 휴지로 만들고 있는가?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