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에서 길을 달려오는데 꽃이 쑥 얼굴을 내밀었다. “아니 벌써?” 절로 튀어나오는 소리. 여느 해보다 1주 이상, 혹은 2주 가까이 빨라진 것 같았다. 3월이 훌쩍 넘어가야 보이던 꽃이 벌써. 전남 구례쯤 왔을 때 혹시나 해서 검색창을 열었다. 역시나. 화엄사 홍매화가 꽃잎을 열었다는 소식이 올라와 있었다. 남쪽 섬에 머문 게 고작 일주일인데, 그사이 봄이 이만큼이나 서둘러 발걸음을 내디뎠다.
빠른 꽃 소식에 세상은 ‘기상 이변’이라며 떠들썩하다. 요상한 이 봄을 길 위에서 눈으로, 몸으로 체감한다. 따사로운 햇볕도 계절이 달라졌다는 걸 어깨를 톡톡 두드려 알린다. 아, 화엄사의 꽃이 만개할 때가 됐구나. 묵직하게 틀고 앉은 각황전 곁, 붉은 그 자태를 찾지 않을 수 없다. 몸을 비틀어 하늘을 향해 봄의 춤을 추는 그 나무는 이맘때면 구례의 주인공이 된다. 홍매화가 꽃 소매를 활짝 펼치면 이내 꽃향도 만발한다. 산수유가 노란 안개처럼 피어나고, 동백은 빨간 꽃송이를 툭툭 길 위로 떨어뜨릴 거다. 그 후론 길상암으로 오르는 길에서 벚꽃이 분홍빛 머금은 허여멀건 한 향기를 흩날릴 테지. 인적을 피해 길상암 마루에 앉아 하염없이 봄볕을 즐길 때가 왔다.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성질 급한 봄을 봤나.
<글·사진 정태겸 글 쓰고 사진 찍으며 여행하는 몽상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