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군의 ‘엘리펀트 워크(Elephant Walk·코끼리 걸음)’가 2년 만에 다시 등장했다. 한미연합훈련인 ‘2024 자유의 방패(FS·Freedom Shield)’ 연습의 하나로 실시됐다. 지난 3월 7일 수원기지에서 열린 이번 훈련에는 퇴역을 앞둔 F-4E 팬텀 8대를 선두로 F-15K, KF-16, F-16, FA-50, F-5, F-35A 등 전투기 33대가 나섰다. 공군이 보유한 전 기종의 전투기가 처음으로 모두 참가했다. 이전까지는 단일 비행단 전력으로만 이 훈련을 해왔다. 공군은 압도적 공군력을 과시하는 훈련이라고 밝혔다.
■‘코끼리 걸음’의 시그널
원래 엘리펀트 워크는 전투기나 폭격기 등 군용기 수십 대가 미사일 등 무기를 최대한 장착하고 신속하게 출격하기 위해 하는 훈련이다. 이 훈련을 할 때면 군용기들은 활주로에서 밀집 대형으로 이륙 직전 단계까지 지상 활주를 한다. 전투기나 폭격기들이 유도로를 따라 활주로로 이동하는 모습이 마치 코끼리 떼가 한꺼번에 이동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사실 먹이나 물을 찾기 위해 지축을 울리는 굉음을 울리며 이동하는 아프리카 코끼리 떼의 모습은 상당히 공포스럽다.
엘리펀트 워크는 본래 미 공군(USAF)이 쓰는 용어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수백 대 이상의 폭격기와 전투기가 빨리 이륙한 후 공중에서도 동일한 대형을 유지하게 하려고 고안했다. 이 훈련을 하는 나라는 미국과 우방국인 한국 등 일부 국가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원래 하지 않았는데 중국이 미국에 맞서 유사한 퍼포먼스를 시작했다.
엘리펀트 워크는 런웨이(runway·활주로)에서 펼쳐지는 ‘무력시위’ 성격이 짙다. 패션쇼에서 모델이 걷는 무대도 ‘런웨이’다. 현대에 와서 엘리펀트 워크는 신속 출격보다는 적국에 압도적인 군사력과 응징능력 과시로 경고를 보내기 위해 주로 이뤄지고 있다. 한국 공군도 북한의 도발 행위가 있으면 중무장한 전폭기들의 엘리펀트 워크 장면을 공개하고 있는데 가벼운 무장으로만 할 때도 있다. 공군의 이번 엘리펀트 워크는 지난 55년간 대한민국 영공을 수호하고 퇴장하는 팬텀에 바치는 전투기들의 헌정 행사였다.
실제 공군이 유사시 신속 출격을 목적으로 하는 주요 훈련은 ‘전시 최대무장 장착훈련’이다. 한국 공군의 공중종합훈련인 ‘소링 이글(Soaring Eagle)’에서는 빠질 수 없는 필수훈련이다.
미 공군은 주로 중국의 군사적 움직임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미군의 공중전력 우위를 과시하면서 경고를 보내는 방법으로 엘리펀트 워크 장면을 공개해왔다. 한국 공군과 미 공군의 엘리펀트 워크 훈련은 중국과 북한 등을 겨냥해 늘어나는 추세다. 군사적 긴장이 그만큼 높아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엘리펀트 워크’는 그 자체로 군사적 행위를 넘어 한·미관계를 보여주는 정치·외교적 시그널이기도 하다. 한국과 미국 공군은 2012년에 처음으로 군산 미 공군기지에서 KF-16, F-16 전투기 60여 대가 참가하는 연합 엘리펀트 워크 훈련을 했다. 이전까지 미 공군은 단독으로 이 훈련을 해왔다.
한·미는 북한의 미사일 도발이나 핵실험 등에 맞대응해 연합 엘리펀트 훈련을 수시로 해왔다. 그러나 한·미가 항상 공감대를 형성한 것은 아니었다. 미국은 이 훈련을 같이하자는 한국군의 요청을 몇 차례 거부하기도 했다. 북한이 2022년 3월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발사하자 한국군은 미군과 함께 엘리펀트 워크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미국 측이 응하지 않아 한국군 단독으로 F-35A 28대를 동원해 맞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미군이 동참하지 않은 ‘홀로 코끼리 걸음’은 북한에 공개적으로 보낸 강력한 군사적 경고메시지의 효과를 크게 반감시켰다. 이는 당시 북한이 협상에 복귀하기를 바라는 미국 측이 군사적 대응을 자제한 데 따른 것이라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었다. 여기에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미국 측의 불만이 섞인 것 아니냐는 말도 나왔다.
북한이 2022년 5월 미 본토를 위협하는 ICBM을 발사했음에도 불구하고 미 공군의 참여 없이 한국 공군만 엘리펀트 워크를 실시한 것에 대해서도 뒷말이 무성했다.
■‘엘리펀트’ vs ‘드래곤’
미국은 2022년 7월 해병대 F/A-18 호넷 5대, F-35B 라이트닝 II 8대, KC-130J 슈퍼 헤라클레스, 미 공군 F-22 랩터 10대, F-35A 라이트닝 II 10대 등 군용기 수십 대가 일본 이와쿠니(岩國) 공군기지 활주로에 도열한 엘리펀트 워크 무력시위 장면을 공개했다. 미 국방부는 이 모습을 페이스북에 올리면서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을 지원하기 위한 높은 수준의 준비성과 연합 역량을 과시했다”고 설명했다. 중국을 겨냥한 무력시위였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셈이다.
미국은 이전에도 중국의 해상 군사훈련이 일본 오키나와나 타이완 인근에서 이뤄지면 경고 차원의 엘리펀트 워크를 수시로 해왔다.
중국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맞대응 차원의 무력시위를 했다. 중국은 미군의 엘리펀트 워크에 맞서 인민해방군 공군의 위챗 계정인 공군재선을 통해 ‘잠룡만보(潛龍慢步·승천을 준비하는 용의 걸음)’라는 제목으로 4.5세대 전투기의 지상 활주 훈련 장면을 공개했다. 별칭이 잠룡(潛龍)인 4.5세대 젠(殲)-15 전투기 9대가 비행장 활주로에서 지상 활주 훈련을 하는 모습이었다. 공군재선은 “오늘의 영상은 내일의 역사”라면서 미국을 겨냥했다. 중국은 스텔스기인 젠-20을 비롯해 젠-16, 젠-10, 젠-11, 수호이-35, 수호이-30, 수호이-27 등 다양한 전투기를 보유하고 있어 질과 수량 면에서 일본을 넘어섰다는 평가도 나온다.
미군은 일본과도 수시로 이 훈련을 하고 있다. 주로 일본 오키나와 가데나 공군기지에서 실시하는 미·일 연합 엘리펀트 워크는 사실상 중국을 겨냥한 것이다. 지난해 7월에는 괌 기지에서 프랑스 공군과 함께한 엘리펀트 워크 훈련을 공개하기도 했다.
미 7공군은 지난해 5월 오산 공군기지에서 실시한 훈련을 ‘매머드(mammoth) 워크’로 명명했다. 미 7공군 예하 제51전투비행단과 제8전투비행단 등 여러 부대가 참여한 훈련이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차원이었다. 당시 훈련에는 F-16을 비롯해 ‘탱크 킬러’ A-10 선더볼트 II 공격기, 고공정찰기 U-2S, 수송기 C-12 휴런 등이 참여했다.
미 해군은 항공 촬영 카메라로 동시에 포착한 2~3개 항모전단의 모습을 종종 공개한다. 이는 ‘포토 EX(Photo Exercise)’의 하나로 일종의 무력시위다.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군사 옵션을 사용할 수 있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엘리펀트 워크와 ‘포토 EX’는 단순한 훈련을 넘어서 자국민에게는 신뢰를, 상대에게는 두려움을 심어주기 위한 공보작전 성격을 지닌다.
<박성진 ‘안보22’ 대표·전 경향신문 안보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