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자는 민주주의의 도래를 저지한다. 억압적 권력자는 폭력으로 민주주의를 파괴한다. 하지만 이들이 무슨 짓을 하든 민주주의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에 대한 상상과 욕망은 더욱 강렬해지고, 끊임없는 저항이 일어날 뿐이다. 민주주의의 진정한 적은 민주화 이후에 등장한다. 한국 민주주의가 상상의 대상이 아니라 현실의 제도로 구축돼야 하는 시대가 도래하자, 그 제도를 내부로부터 무너뜨리는 질병도 함께 나타났다. 지금의 거대 양당은 민주주의의 실행자보다 그런 질병을 퍼트리는 병원체에 가깝다. 위성정당은 그들이 만들어낸 최악의 질병이다.
공통의 규칙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에 대한 평가는 다양할 수 있지만, 선거제도 개혁을 위한 오랜 노력의 결실이라는 점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위성정당은 가짜 이름을 내건 빈껍데기 정당이고, 그 결실을 무력화하는 천박한 꼼수다. 이런 꼼수가 실행될 수 있는 이유는 단순하다. 다수가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공통의 규칙 따위 무시해도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파렴치한 정치인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수많은 유권자가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의 의석을 늘릴 수 있다면, 선거제도의 파행을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형식적 법과 제도는 만들었지만 그걸 제대로 실행하려는 사람이 없으니, 제도는 제도 아닌 것이 된다.
위성정당의 등장이 의미하는 것은 한국 민주주의가 공통의 정치적 규칙을 수립하는 데 실패했다는 사실이다. 흔히 그런 규칙을 게임의 공정한 룰에 비교하는데, 이 두 가지는 전혀 다르다. 정치는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세력 간의 경쟁이 아니라 공동체의 삶을 함께 운영하는 활동이다. 정치는 공동체의 구성원이 공유하는 공통의 원칙과 가치에 기초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선거제도는 단순히 정당 간 경쟁을 공정하게 관리하기 위한 게임의 룰이 아니다. 선거는 인민의 일반의지를 형성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이고, 제도의 세부 내용 전체가 이러한 목적에 충실하게 구성돼야 한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정당 지지율에 부합하도록 의회를 구성하는 것이 일반의지를 더 민주적으로 형성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공통의 규칙으로 수립하려는 시도였다. 위성정당은 이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조롱한다.
한국에 떠도는 미신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선진국은 정당 사이의 협의와 타협으로 국가를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반면, 한국의 정당들은 서로의 이념과 원칙만 내세우면서 극단적 갈등으로 치닫는다.’ 이런 논리에 빠진 사람은 모든 정치적 문제를 거대 양당 간 협상의 문제로 축소한다. 정치란 이런 것이 아니다. 이른바 선진국, 즉 자신의 고유한 민주주의 모델에 따라 어느 정도 안정된 정치를 운영하는 서구 국가와 한국의 근본적인 차이는 정치적 협상의 유무가 아니라 정치적 공통 규칙의 유무에 있다. 그런 규칙의 종류와 수준은 다양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것 중 하나를 꼽자면, 합리성의 규칙이 있다. 정치는 합리적 언어의 소통을 통해 이루어지는 활동이고, 법과 제도는 모순이 없는 정합적 체계로 구축돼야 하며, 모든 정치적 행위는 헌법의 기본 원리에 따라 정당화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등이다.
정치 공동체와 공통의 표준
공통 규칙의 부재는 단순히 정당 정치의 수준이 아니라 정치 공동체 전체의 문제다. 공동체(community)란 공통의 것(common)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한국의 언어 및 문화 공동체는 너무나 확고해서 ‘우리나라 사람’과 ‘외국인’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경계를 만들 정도다. 그런데 한국의 정치 공동체는 어떠한가?
민주주의 정치 공동체에서는 모든 구성원이 시민이라는 동등한 지위를 공유한다. 그 공동체의 삶을 유지하는 것은 수많은 규칙의 체계다.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에 따라 공동체의 여러 영역을 구분하고 관계 맺는 규칙들이 구성된다. 거시적으로는 국가, 정치, 사회, 가족의 관계가 규정돼야 할 것이고, 구체적인 수준마다 그에 맞는 규칙이 필요하다. 예컨대 국가와 기업, 서울과 지방, 교육과 시장의 관계 등을 다루는 공통의 규칙, 또한 언론과 의회, 정당과 정당, 사회운동과 정치의 관계에 관한 규칙도 있어야 한다.
어떤 규칙이 공통의 것으로 공유되려면 객관적 표준으로 수립돼야 한다. 정치 공동체를 운영하는 것, 즉 정치란 표준 규칙을 수립하고 개선하는 작업이다. 한국에는 제대로 된 정치적 표준이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의 근대화는 외부의 규칙을 변형해 내면화하는 과정이었다. 미국, 유럽, 일본에서 들어온 것이 뒤섞이고, 그마저 한국 현대사의 정치적 변화를 통해 왜곡되면서 규칙의 표준 체계를 정합적으로 구성하는 것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예컨대 ‘모든 개인은 시민으로서 평등하다’라는 민주주의 헌법의 원리조차 여전히 표준 규칙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소수자들이 국가와 사회의 폭력에 직면하고, 파업하는 노동자는 노골적 탄압을 받으며, 성평등은 어느새 금기어가 돼버렸다.
한국의 모든 논쟁이 이른바 진영 논리로 수렴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공통된 규칙이 없고, 그것을 수립할 의지도 없으니, 모두가 자기 세력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만 움직인다. 한국에서 정치는 공동체를 운영하는 활동이 아니라 국가의 권력과 재화를 독점하기 위한 경쟁으로 이해된다. 어떤 규칙에 따라 공동체를 운영할 것인지가 아니라 누가 정권을 잡을 것인지가 정당 정치의 근본 질문이 됐다. 표준 규칙의 체계가 없으니, 정권의 성격에 따라 국가 운영의 방향이 널뛰듯 바뀐다. 이는 한국 정당 정치의 특징만이 아니다. 지금 보건 영역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보라. 보건제도의 목적과 체계가 공통의 규칙으로 존재하지 않으니, 모두가 자기 직종의 이익을 확대하기 위한 싸움에만 몰두한다.
이번 총선에서는 모든 종류의 규칙이 사라지고, 의회권력을 향해 경쟁하는 잡다한 세력의 이합집산만 남았다. 총선 관련 뉴스를 보라. 정당이 어떻게 합쳐지거나 찢어지고, 누가 어느 정당으로 갔고, 누가 공천을 받았거나 받지 못했다는 소식만 가득하다. 연예면과 정치면의 구별이 사라지고, 진정한 의미의 정치적 논쟁은 그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이는 정치 공동체와 정당 정치가 완전히 분리된 결과다. 위성정당은 이런 엉망진창의 상징이다. 한국 민주주의의 진정한 적은 공통의 것을 부정하고 파괴하는 자들, 정치 공동체를 망각하는 자들이다. 물론 정치인들만 여기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박이대승 정치철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