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부터 ‘한반도 위기설’이 거론되고 있다. 김정은 조선노동당 총비서 겸 국무위원장이 지난해 12월 당 중앙위 8기 9차 전원회의에서 남조선을 동족이 아닌 적대적 교전 국가로 규정한 데 이어 ‘대한민국 초토화’까지 언급하면서부터다. 군 고위 관계자들은 국지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남북 간 군사적 충돌 가능성이 높아져 가고 있는 상황이지만 국민은 긴장 완화와 남북 간 평화적 공존을 원하고 있다. 국민의 희망과 달리 남북 간 대립이 격화된 데는 2018년 체결했던 9·19 군사합의 폐기가 큰 몫을 하고 있다. 6개 항목의 22개 조항으로 돼 있는 남북 군사합의서는 우발적 무력충돌이 전면전으로 번지지 않도록 남북 간 땅·바다·하늘의 완충구역을 설정하고 적대행위를 중단하는 것을 핵심 내용으로 담고 있다.
9·19 합의가 폐기된 것은 한국군이 지난해 11월 21일 북한의 군사정찰위성 발사를 구실로 9·19 합의 가운데 ‘공중 적대행위 금지구역(비행금지구역)’ 조항의 효력 정지를 발표한 것이 빌미가 됐다. 북한의 군사정찰위성 발사 자체가 9·19 합의 위반은 아니다. 북한은 남측의 조치 하루 뒤 9·19 군사합의 전면 파기를 선언했다. 지난 1월에는 합참이 9·19 합의에 따른 지상·해상의 적대행위 중지 구역(완충구역)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남북 간 긴장과 북한의 무력 위협의 강도는 갈수록 높아져 가고 있다.
■북 해안포 개방의 의미
현 정부는 북한의 해안포 개방을 북이 9·19 합의를 지키지 않은 대표적 사례로 거론했다. 군 당국은 북측이 9·19 합의 체결 이후 백령도·연평도 등 남측 서북 도서를 겨냥해 북한 섬과 인근 내륙 해안에 배치된 포문을 지난 5년간 총 약 3400회 개방했다고 밝혔다. 숫자로 보면 엄청나게 많은 횟수다. 신원식 국방부 장관은 지난해 10월 국정감사에서 “북한이 매일 3~4회 (해안) 포문 폐쇄 의무조항을 위반해온 셈”이라며 “그런데도 (우리는) 9·19 합의를 신줏단지 모시듯 지키고 있다”고 말했다.
9·19 합의에는 해상 분야와 관련해 “서해 완충수역(초도~덕적도)에서는 포 사격·해상 기동 훈련을 중지한다. 해안포와 함포의 포구 포신 덮개를 설치하고 포문 폐쇄 조치를 한다(제1조 제2항)”고 명시돼 있다. 신 장관은 “포문 개방은 공격을 하기 위한 전 단계의 위협 조치”라고 말했다.
과거 문재인 정부는 북한의 해안포 개방에 대해 “적대적 의도가 없다”면서 시설물 관리 차원으로 해석했다. 해안지역에 설치된 포의 특성상 습기 제거나 환기 등 시설물 관리 차원으로 봤다. 북한군 포병은 굴속에 포를 숨겨놓고 공격할 때 이를 노출하는 이른바 ‘갱도 포병’이다. 굴속에 포를 숨기는 방식이어서 그만큼 습기에 취약하다.
이를 놓고 윤석열 정부는 지난 정권에서 군이 북한의 해안포 공개 의도를 자의적으로 해석해 합의 위반에 ‘면죄부’를 줬다고 주장한다. 반면 문재인 정부 관계자들은 ‘전략·전술적 관리’를 해왔다는 입장이다. 북한의 해안포 포문 폐쇄 조치를 합의 원칙으로 하되, 시설물 관리를 위한 것일지라도 포문 개방 사례를 모아 주기적으로 9·19 합의 위반사항으로 북한에 전달해 부담을 주는 것도 하나의 전술적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북한의 해안포 개방이 적대적 의도를 지닌 의도적 군사합의 위반인지를 따지려면 해안포 ‘포신’의 노출 여부가 중요하다. 이를 놓고 문재인 정부 청와대 안보실 관계자 A씨는 “북한군이 남측을 위협하는 차원에서였다면 포문 개방뿐만 아니라 포신을 노출한 것도 관측이 됐어야 하지만 그런 사례는 거의 없었다”고 지적했다. 북한의 해안포 개방이 단순한 시설물 관리 차원이었기에 전략적 측면에서 합의 위반 사실을 통보하고 포문 폐쇄 이행을 촉구했을 뿐 이를 공개적으로 문제 삼지는 않았다는 설명이다. 고위 예비역 장성 B씨는 “현 정부가 북한의 해안포 개방을 집중적으로 내세우면서 9·19 군사합의를 비난하는 것은 전체 맥락을 숨기고, 9·19 합의를 폐기하기 위한 핑계로 삼은 ‘대국민 호도’”라고 말했다.
■부메랑이 된 소극적 9·19 홍보
9·19 합의는 남북 모두에 해당하는 조치로, 이명박 정부 당시 작성했던 ‘남북군비통제 추진계획서’에 기반해 만들어졌다. 한국이 북한보다 감시정찰능력이 월등하다는 측면에서 비행금지 조처는 북한군에 더 큰 제약이었다.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육군 대장) 출신인 김병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018년 당시 군 당국은 비행금지구역 설정 이후 남북 감시정찰능력 변화를 평가하면서, 사람 시력으로 치면 우리는 1.5에서 1.4로, 북한은 0.4에서 0.1이 된다고 평가했다”며 “9·19 군사합의로 우리뿐만 아니라 북한의 감시정찰능력도 제한받는데, 우리는 여전히 북한을 다 들여다볼 수 있지만 북한은 아예 깜깜이가 됐다”고 지적한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
서해 해안포 규모에서도 북측이 남측보다 4배나 많다. 9·19 합의에 따라 서해 해상 기동훈련을 제한받는 함정은 북한이 6배 더 많았다. 서해 북한 해군 전력의 80% 이상이 훈련을 못 하게 된 반면 한국 해군 훈련 구역은 덕적도 이남이라 합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러 사항을 종합해보면 일종의 군비통제안이었던 9·19 군사합의는 북한에 불리한 측면이 많았다. 국방부 대북정책관으로 당시 합의를 주도했던 김도균 전 수방사령관은 “북한 군부는 내부적으로 군사합의를 반대했지만, 김정은 위원장 지시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며 “김 위원장이 직접 합의한 9·19 군사합의가 북한에 훨씬 불리하다는 점을 우리가 홍보할 수 없었던 것은 자칫 북한의 반발을 살 수 있기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이 때문에 문재인 정부의 ‘9·19 남북 군사합의서’ 대국민 홍보는 거의 최악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았다. 남북 군사합의서가 담고 있는 6개 항목의 하나하나는 모두 국방부의 백브리핑이나 군 고위관계자 및 실무자들의 자세한 배경 설명이 요구되는 사안들이었음에도 제대로 된 설명이 이뤄지지 않았다. 남북 최전방 감시초소(GP) 폭파·철거 과정에서는 군 정보당국의 사전 판단과 달리 북측 GP가 지하요새화된 시설이 아닌 정황이 드러났다. 북측 GP 시설의 상당 부분이 참호 형식으로 연결됐다는 점에서 군 정보당국이 북측 GP의 시설 역량을 과대평가한 게 아니냐는 논란도 불거졌다.
당시 국방부는 마치 양계장 닭들에게 모이를 뿌리듯 ‘남북 군사합의’ 보도자료와 해설자료를 기자들에게 돌렸다. 이어 한두 차례 질의응답을 한 게 전부여서 “군이 북한에 양보한 것을 숨겼다”는 불필요한 억측이 계속됐다. 여기에는 군사작전에 일부 제약을 받게 된 합참 작전부서 장군들의 반발도 한몫했다.
문재인 정부의 소극적 설명은 정권이 바뀌면서 부메랑이 돼 돌아왔다. ‘9·19 군사합의서가 한국군의 손발을 묶어 안보를 위태롭게 한다’는 왜곡된 프레임이 국민에게 먹혀들었기 때문이다. 한국군에 유리한 측면의 9·19 군사합의안을 국민에게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탓이다.
<박성진 ‘안보22’ 대표·전 경향신문 안보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