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은행의 아우성
코로나19가 한창일 때, 제주는 나름의 ‘특수’를 누렸다. 하늘길이 끊겨 해외로 나갈 수 없었던 내국인 관광객들이 제주를 찾았기 때문이다. 관광객들은 식당, 펜션, 숙박업소, 골프장 등을 주로 찾았다. 업주들은 대출을 받아 급등한 임대료를 내거나 가게를 확장하는 데 썼다. 해외여행이 본격 재개되자 상황은 반전됐다. 제주를 찾는 내국인 관광객 수가 줄어든 탓이다. 제주관광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제주를 찾은 내국인 관광객은 1264만명으로, 전년 1377만명 대비 8.2% 줄었다. 손님이 줄면서 매출은 급감했다. 게다가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경기마저 꽁꽁 얼어붙었다. 대출을 받은 차주들의 원리금 상환에 제동이 걸렸다. 지역의 대표 은행인 제주은행에도 비상등이 켜졌다. 제주은행 관계자는 “손님이 줄어 장사가 안 되는데 경기마저 가라앉아 대출받은 자영업자들의 연체율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제주은행의 가계대출 연체율은 지난해 3분기 말 기준 1.45%로, 전년 말 대비 0.69%포인트 뛰었다.
조선과 자동차 등 협력업체와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여·수신을 취급하는 부산은행도 사정은 비슷하다. 부산은행 관계자는 “지방은행 특성상 주고객 층에 대기업은 거의 없다. 대부분 협력업체이거나 영세자영업체들이다. 이들은 경기 변동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특히 부산은 인구 감소와 고령화로 산업 기반이 약화된 터여서 최근 고물가와 경기 악화 영향을 더 크게 받는 것 같다”고 했다. 통계청과 한국고용정보원 등에 따르면 부산 인구는 2017년 341만명 수준에서 매년 줄어 지난해 12월 기준 329만여명(전년 동월 대비 0.7% 감소) 수준으로 감소했다. 고령화 속도는 0.968로 17개 광역 지자체 중 가장 높다. 연체율도 덩달아 치솟았다. 부산은행 연체율은 2020년 0.57%에서 지난해 12월 0.77%를 기록했다. 이 관계자는 “부산은행은 ‘부산형 사회연대기금’을 통해 임직원들이 월급의 0.5%를, 노사가 매월 1억원을 출연해 지역 내 중소기업을 돕고 있다. 지방은행들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 지역경제 활성화와 지역금융 서비스 확대라는 지방은행 본연의 역할을 수행 중이고, 구성원들도 자부심을 가지고 여러 사회적 공헌활동을 하고 있다. 하지만 국가균형발전이라는 목적 아래 부산에 내려온 공공기관들은 주거래은행 선정에서 지방은행을 외면하고 있어 안타까운 마음이 크다”고 했다.
전북 도내 대기업은 사실상 하림이 유일하다. 전주시를 제외한 전체 시·군이 소멸위험 지역으로 분류될 만큼 청년인구 유출과 저출생 문제도 심각하다. 국민연금공단과 전기안전공사 등이 입주해 있는 전주혁신도시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은 서울 등을 오가며 출퇴근하는 경우가 많다. 주말이면 이 일대는 유령도시가 된다. 1960년대 250만명을 웃돌던 인구수는 지난해 말 기준 175만명으로 쪼그라들었다. 전북은행은 지역경제 쇠퇴 영향으로 수년째 수신액 확보에 애를 먹고 있다. 전북은행 관계자는 “기업 고객이 사실상 전무하다. 기업여신보다는 대부분 저신용 대출과 같은 서민금융을 주로 취급한다. 도내 지역경제가 장기간 침체돼 있는 데다 코로나19와 최근 경기 불황까지 겹치면서 그 여파가 소상공인 매출 저하로 이어져 차주들의 신용 상태도 나빠졌다”고 전했다. 전북은행의 가계대출 연체율은 지난해 3분기 말 기준 2.1%로 지방은행 중 가장 높다. 전북은행은 영업 역량을 수도권과 해외 진출 쪽으로 집중하고 있다. 이 관계자는 “당국의 정책적 지원 없이는 시중은행, 인터넷은행 등과의 경쟁이 어렵다.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서울이나 중부지역, 해외 등지에 점포를 내고 비대면 영업을 강화하는 추세”라고 말했다.
지방은행의 위기가 갈수록 심화하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수익성과 성장성 모두 하락하면서 시장에만 맡겨둬서는 생존이 어려운 지경이란 관측마저 나온다. 위기의 원인은 복합적이다. 지역경제 침체, 대형 시중은행과의 경쟁, 인터넷전문은행과 빅테크 등 디지털 금융 확산, 금융권에 불고 있는 친환경·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 등이다. 경쟁에서 뒤처지면서 지역예금은 빠져나가고, 자금 조달에도 애를 먹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여건이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인다는 점이다. 금융산업의 이러한 구조 변화는 일시적이지 않고 더 확대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당국이 지방은행에만 지원을 늘리는 것은 경쟁 관계인 다른 은행들과의 형평성 문제와 특혜 시비를 불러올 수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지방은행은 설립 취지에 역행한다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수도권이나 해외로 진출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이로 인해 지방은행의 설립 취지이자 역할인 ‘지역 자금을 해당지역에 재투자하고 분배하는 선순환’을 기대하기도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지방은행의 위기가 지역경제를 위협하고 지방소멸을 가속화할 것이란 우려가 나오는 배경이다.
위태로운 지방은행
지방은행은 1967년 ‘1도(道) 1행’ 원칙에 따라 10개가 설립됐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을 거쳐 현재는 6개가 영업 중이다. BNK금융지주 자회사인 부산은행과 경남은행, DGB금융지주 자회사인 대구은행, JB금융지주 자회사인 전북은행과 광주은행, 신한금융지주 자회사인 제주은행 등이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이들의 총자산은 지난해 9월 말 기준 259조원으로, KB국민은행의 총자산 519조원의 절반(49.9%) 수준에 머물러 있다.
지역을 기반으로 수익을 얻는 지방은행이 어려움에 처한 가장 큰 원인은 지역경제 침체 때문이다. 비수도권의 최근 경기는 수도권에 비해 크게 나빠진 상황이다. ‘법원통계월보’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기준 지방법원에 접수된 법인파산신청이 459건으로, 전년 동월(254건)과 비교해 80.7% 늘었다. 같은 기간 수도권 법원에 신청된 법인파산 건수는 60.5% 증가했다. 지방은행의 이자이익 의존도가 상대적으로 높다는 점도 문제다. 시중은행은 총이익에서 이자이익이 차지하는 비중이 80% 수준인 데 반해 지방은행은 이보다 10%포인트 정도 더 높은 90%대다. 경기가 얼어붙을 때 받는 충격이 상대적으로 클 수밖에 없다.
지방은행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부터 수익성과 성장성이 하락해 현재는 정체 상태다. 총자산순이익률(ROA·은행의 총자산 대비 당기순이익 비율)은 2007년 0.98%에서 2015년 0.42%까지 하락한 후 현재는 평균 0.5%대에 머물고 있다. 자기자본순이익률(ROE·자기자본에 대한 당기순이익 비율) 역시 2007년 17.7%에서 2015년 6.0%까지 하락한 후 지금은 평균 6~7% 수준에 그친다.
지방은행의 수익성과 성장성이 위축되면서 건전성에도 비상등이 켜진 상황이다. 금융당국에 따르면 5대 지방은행(부산·경남·대구·광주·전북)의 지난해 3분기 말 무수익여신 총액은 7717억원이다. 전년 동기(5227억원) 대비 47.6% 증가한 수치다. 무수익여신은 금융기관이 회수할 가능성이 없는 부실채권으로, 이자조차 내지 못하는 여신을 일컫는다.
지방은행이 수도권이나 해외로의 진출에 집중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한국금융연구원이 지난해 12월 13일 내놓은 ‘지방은행은 필요한가’ 보고서를 보면, 지방은행의 총 점포 수 대비 서울·수도권 점포 수 비중은,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이후 2014년까지 2~3%대였으나, 현재는 7~8% 수준까지 올랐다. 해외점포 수 역시 2014년 4개에서 2022년 말 기준 17개로 4배 이상 늘었다.
지방은행의 존재 이유
지방은행의 핵심 역할은 지역 중소기업에 대한 자금공급이다. 이병윤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해당 보고서에서 지방은행과 시중은행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시중은행들은 전국의 차주들을 대상으로 신용평가를 하고 대출 결정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일관성 있는 대출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해서 지역별 특성을 일일이 고려하기 어렵다. 따라서 (신용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지방의 중소기업들은 시중은행들로부터 충분한 대출을 받기 어렵다. 반면 지방은행들은 그 지역 기업들과 장기적으로 지속하는 밀착된 관계를 통해 외부에 드러나지 않는 차주의 비재무 정보를 수집하는 이른바 ‘관계형 금융’을 통해 지역 중소기업의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기반으로 신용을 평가해 맞춤형 대출을 제공할 수 있다.”
서류상 재무제표에 의존하는 시중은행은 지방의 신용도가 낮은 중소, 영세기업에 대출해주기를 꺼리지만, 지방은행은 직접 발로 뛰며 형성한 지역네트워크를 활용해 신용도가 낮은 업체들에도 대출 문턱을 낮출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 보니 지방은행 입장에선 자금 조달과 대출의 금리, 금융 리스크가 상대적으로 높아질 수밖에 없다.
지방은행들이 지역 중소기업에 대한 자금공급을 규정한 ‘중소기업 의무대출 비율’의 개선을 요구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중소기업 의무대출은 신용도가 낮고 담보력이 부족한 중소기업에 은행이 의무적으로 대출하도록 한 제도다. 지방은행은 1997년부터 60%(시중은행 45%)의 비율을 적용받아왔다. 이를 준수하지 않으면 한국은행 금융중개지원대출 한도에서 미달 금액의 일부가 차감된다. 이러한 비율의 차등 적용에 따라 그간 지방은행에 대한 역차별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돼왔다. 이 비율은 지난해 7월에서야 50%로 일원화됐다.
문종일 지방은행노동조합협의회 의장은 “지방은행들이 지역 내에서 중소기업 의무대출 비율을 충족하려면 시중은행들이 대출을 꺼리는, 즉 신용도가 낮은 중소, 영세업체들에도 리스크를 안고 대출을 늘려야 한다. 지방은행의 존재 이유가 당장의 이익보다는 지역 기업에 대한 자금 중개와 자금의 역내 재순환 등을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 국가균형발전과 같은 사회적 가치 실현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지역경제와 지방소멸 해소에 기여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국은 대형 시중은행들과 경쟁하라거나, (사회적 공헌과 같은) 은행의 의무만 강요한다”고 말했다.
“국가균형발전·지방소멸 해소 위해 지원 필요”
지방은행들은 국가균형발전 차원의 정책 지원이 뒤따라야 한다고 당국에 요구한다. 대표 현안은 지방으로 이전한 공공기관의 주거래은행 선정이다. 지방은행들은 공공기관 지방 이전 취지가 낙후된 지역경제에 도움을 주고 국가균형발전을 도모하자는 건데,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불만을 표출한다. 지난 1월 10일 지방은행노동조합협의회와 윤영덕 더불어민주당 의원(광주 동구남구갑) 등에 따르면 대구·경북 혁신도시 이전기관 23곳 중 단 1곳만 대구은행과 거래 중이다. 부산에 이전한 금융공기업과 공공기관 13곳 중에선 영화진흥위원회와 게임물관리위원회만 부산은행을 1순위 은행으로 거래 중이고, 나머지 11곳은 주거래은행으로 시중은행을 이용하고 있다.
막대한 자금력을 앞세워 지자체와 공공기관 등에 기여금을 내는 시중은행들과 금고 또는 주거래은행 선정 경쟁을 벌이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지방은행들은 지방공기업의 경우 시행령에서 ‘수익성과 안전성을 고려하여 결정’하도록 돼 있는 지방공기업법 시행령을 지역금융기관 이용성, 지역기여실적 등을 종합적으로 반영할 수 있도록 변경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이전공공기관의 경우 지방이전의 기본 취지를 살려 거래실적과 지역기업 지원 내용 등을 공공기관 평가에 반영해 해당지역 지방은행과 일정 부분 의무적으로 거래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자체 금고 선정에 반영되는 지역재투자 평가제의 보완도 요구 중이다. 2018년 10월 도입해 2020년부터 실시한 지역재투자 평가는 금융회사의 지역 내 자금공급, 서민대출 지원, 중소기업 지원 등을 평가해 5등급으로 구분한다. 결과는 금융감독원의 경영실태평가와 지방자치단체·지방교육청 금고 선정 기준 등에 활용된다. 하지만 평가 결과 반영이 의무가 아니라 지자체 자율로 선택할 수 있어 실효성 문제가 대두된다. 문종일 의장은 “지방 이전 공공기관들이 주거래은행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수익성만 따진 결과 지방은행이 외면받고 있고, 지자체 금고 선정 과정에서는 지자체가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게 돼 있어 시중은행들과의 경쟁이 어렵다”고 밝혔다.
강다연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천문학적인 수익을 거두는 대형 시중은행과 달리 지방은행은 지역경제 악화 등 영향으로 갈수록 부실해지고 있다”며 “경쟁만 강요할 게 아니라 지역소멸 해소와 국가균형발전이라는 큰 목표 아래 정책적 지원을 확대하는 것이 지역경제와 지방은행을 살리는 현실적인 방안”이라고 말했다.
<안광호 기자 ahn7874@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