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고려도경’의 서긍, 송나라 간첩 58명과 개경에 도착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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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년 송나라가 고려에 파견한 사신단을 태운 최첨단 거함 ‘신주(神舟)’의 추정도. <고려도경>에 따라 추정해보면 신주는 길이 30여 길(90m), 높이 9길(27m), 폭 7길 5자(24m)에 이르고, 1척당 선원 180명 태울 수 있다. /출처: 문경호 교수, ‘도쿄대 소장 당선지도를 통해 본 신주의 선형과 구조’,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2023

1123년 송나라가 고려에 파견한 사신단을 태운 최첨단 거함 ‘신주(神舟)’의 추정도. <고려도경>에 따라 추정해보면 신주는 길이 30여 길(90m), 높이 9길(27m), 폭 7길 5자(24m)에 이르고, 1척당 선원 180명 태울 수 있다. /출처: 문경호 교수, ‘도쿄대 소장 당선지도를 통해 본 신주의 선형과 구조’,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2023

쓴다 쓴다 하면서 미뤄뒀다가 해를 넘긴 아이템이 있습니다. <고려도경>을 쓴 송나라 사신 서긍(1091~1153)이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 되는 해가 2023년이었는데요. 하지만 그냥 넘길 수 없죠. 음력으로 치면 아직 해가 바뀌지도 않았고요.

또 귀국한 서긍이 <고려도경>을 써서 송 휘종(재위 1100~1125)에게 바친 것이 1124년(인종 2)이었습니다. 따라서 2024년은 <고려도경> 편찬 900주년이 되는 해가 됩니다. 그러니 ‘900주년 기념’ 기사는 유효합니다.

■비색 청자와 세밀가귀

<고려도경> 하면 ‘비색 청자’가 첫손가락으로 꼽히죠.

“도기의 푸른 빛을 고려인은 비색(翡色)이라 하는데, 근래에 더욱 정교해져 빛깔이 좋아졌다.”(<고려도경> ‘기명3·도준’)고 했습니다. 나전칠기를 가리키는 ‘세밀가귀(細密可貴)’도 빼놓을 수 없죠.

“고려의 나전 솜씨는 세밀하여 귀하다고 할 만하다(而螺細之工 細密可貴).”(<고려도경> ‘잡속2·토산’)고 했습니다.

칠기에 사용된 나전이 2만~3만개에 이르고, 나전 두께가 0.3~0.8㎜에 불과하니, 그런 찬사가 나온 겁니다.

■음주문화… 1차에 15잔은 기본

이외에도 당대 고려의 풍속을 짐작할 수 있는 여러 흥미로운 장면이 포착되는데요. 음주 문화가 눈길을 끕니다.

“멥쌀로 만든 술은 빛깔이 짙고 맛이 진해 쉽게 취하고 빨리 깬다. …고려인들은 술을 좋아한다.”(<고려도경> ‘기명3·와준’)고 했는데요. 사신단은 방문 첫날부터 고려의 술문화에 혹독한 신고식을 치렀습니다.

“왕(인종)이 사신단에게 술 9번 돌린 뒤 잠깐 쉬었다가 다시 술자리에 앉으라”(<고려도경> ‘궁전2·연영각전’)고 했답니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밤늦게까지 15차례씩 마셨다 쉬었다 마셨다’를 반복한 술자리가 사신단이 돌아가는 순간까지 3차례(<고려도경> ‘연례·헌주·관회·서교송행’)나 이어집니다. 1차에 15잔씩 2차, 3차까지 가는 음주문화의 전통이 이때부터 보인 겁니다.

1123년 1000명에 육박했던 송나라 사신단의 이동 경로 /출처: 문경호 교수,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푸른역사, 2023

1123년 1000명에 육박했던 송나라 사신단의 이동 경로 /출처: 문경호 교수,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푸른역사, 2023

■고려인은 ‘깔끔쟁이’

서긍의 눈에 비친 고려인은 ‘깔끔쟁이’였습니다. 우선 “옛 사서(<위서> ‘열전·고구려’)는 ‘고려인들은 모두 깨끗하다’고 했는데, 지금도 여전히 깨끗하다”고 소개합니다.

그러면서 본의 아니게 ‘더러운 중국인’을 ‘디스’하는 말을 옮깁니다. “고려인들은 중국인이 ‘때가 많다’고 비웃는다. 고려인은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목욕을 하고 …여름에는 하루에 두 번씩 한다”(<고려도경> ‘목욕과 세탁’)는 겁니다,

서긍은 그러면서 고려인들의 약점을 지적합니다. “고려 사람은 은혜를 베푸는 일이 적고, 여색을 좋아하며, 쉽게 사랑하고 재물을 중히 여긴다. 혼인도 쉽게 하고 이혼도 쉽게 한다. …참으로 웃을 만한 일이다.”

■고려 여인의 몽수패션

<고려도경>(‘부녀’)이 설명한 여성 패션도 눈에 띕니다. “분을 바를 때 붉은색은 사용하지 않는데 버들같이 그린 눈썹이 이마의 절반을 차지한다”고 소개했습니다. 그러면서 ‘몽수’라는 특유의 패션을 전합니다.

“검은 비단으로 만든 몽수는 3폭으로 만든다. 한 폭의 길이는 8척이다. 정수리부터 아래로 늘어뜨리면서 얼굴만 드러내게 한다. 나머지 부분은 완전히 땅에까지 내려온다.”

일하는 여인들은 그러나 “몽수를 늘어뜨리지 않고 정수리에서 겹쳐지게 한 후 옷을 추스르며 다닌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몽수 가격이 은 1근에 해당하니 가난한 집에서는 마련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고려도경>은 ‘몽수’라는 특유의 패션을 전한다. “검은 비단으로 만든 몽수는 한 폭의 길이가 8척이며, 정수리부터 아래로 늘어뜨리면서 얼굴만 드러내게 한다”고 소개했다. /사진은 경기도박물관 제공

<고려도경>은 ‘몽수’라는 특유의 패션을 전한다. “검은 비단으로 만든 몽수는 한 폭의 길이가 8척이며, 정수리부터 아래로 늘어뜨리면서 얼굴만 드러내게 한다”고 소개했다. /사진은 경기도박물관 제공

‘돌려입는 치마’도 있었답니다. 8폭짜리 치마를 겨드랑이까지 끌어올려 높이 묶는답니다.

“몸을 휘감을수록 고상한 여인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부귀한 집안의 부녀자는 치마를 만들 때 7~8필까지 사용한다.”

■송나라는 사면초가

지금까지 그러나 <고려도경>과 관련해서 간과한 것이 있습니다. 서긍이 <고려도경>을 제작한 동기 부분이 부각되지 않은 겁니다. 송나라가 대규모 사절단을 고려에 보낸 것은 그때(1123)가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45년 전이었습니다.

1078년 송나라 신종(재위 1067~1085)이 고려로 떠나는 대규모 사신단을 막 건조한 거함(‘신주·神舟)’ 2척에 태웠습니다.

<고려도경>은 “예전(1078)에 신종 황제가 고려에 보낼 사신단을 위해 거함 두 척을 만들도록 했다. 그 규모가 매우 웅장(規模甚雄)했다”고 전했습니다. 이때 송나라가 대규모 사신단을 파견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 송나라는 사면초가에 빠져 있었습니다. 북쪽의 강국 요(거란)와 서북방의 서하 등에게 막대한 세폐(해마다 건네주는 물자)를 대가로 평화를 구걸하는 처지였죠. 그나마 거란과 송 사이에서 등거리외교를 펼치는 고려를 상대로 뜨거운 구애작전을 펼친 겁니다. 송나라 신종의 외교전은 그러나 실패하고 맙니다. 사신단을 맞이한 고려 문종(재위 1046~1083)이 이런 말을 합니다.

“황제가… 후히 하사하니 영광스럽고 감사하나, 삼가 두려운 것도 많다.”(<고려사> 1078년 6월 25일)

‘삼가 두려운 것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송나라의 접근이 부담스럽다는 얘기였죠. 송나라가 고려에 ‘까인’ 겁니다.

그럼에도 신종은 고려를 향한 애정 공세를 멈추지 않는데요.

송나라를 방문하는 고려 사신들의 연도에 고려관(혹은 고려정)을 세워 편의를 제공했고요. 고려와의 공적·사적 무역을 전면 허용하는 고려교역법을 반포하기도 했습니다.(1079년 1월)

■소동파는 ‘혐한파’

친고려정책을 썼던 신종이 죽고 새 황제(철종·재위 1085~1100)가 들어서자 분위기가 달라지죠.

송나라 조정에서 고려비판론이 등장한 겁니다. 특히 고려 지식인 사회에서 ‘신적인 존재’로 추앙받고 있던 소식(소동파·1036~1101)이 실은 ‘지독한 혐한파’였습니다. 소식은 1089~1093년에 끈질기게 고려를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립니다.

그가 주장한 고려의 오해론(五害論·5가지 폐해)은 “고려 오랑캐와는 절대 상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거란(요)의 앞잡이’인 고려에 너무도 많은 선심을 베풀고 있으며, 그 때문에 송나라가 쓰지 않아도 될 막대한 비용을 쏟아붓고 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이런 여론 때문에 송나라의 고려 구애작전은 흐지부지되는 듯했는데요.

<고려도경>은 기본적으로 고려의 실정을 모두 탐문해 오라는 송 휘종의 뜻에 따라 58명의 스파이가 고려의 감시를 뚫고 눈도장·귀동냥으로 얻은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한 고려 관련 정보보고서였다. /출처: 경기도박물관의 <고려도경 900년 전 이방인의 코리아 방문기> 특별전 도록, 2018

<고려도경>은 기본적으로 고려의 실정을 모두 탐문해 오라는 송 휘종의 뜻에 따라 58명의 스파이가 고려의 감시를 뚫고 눈도장·귀동냥으로 얻은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한 고려 관련 정보보고서였다. /출처: 경기도박물관의 <고려도경 900년 전 이방인의 코리아 방문기> 특별전 도록, 2018

■길이 100m의 초대형 선박

그런데 국제정세가 다시 급변하게 되죠. 1100년 송나라 황제가 휘종(재위 1100~1125)으로 바뀌었고요.

북방에서도 대변혁이 일어났습니다. 기존의 요나라 외에도 1115년 건국한 금나라(여진족)가 무서운 기세로 강성해졌고요. 급박해진 송나라는 다시 고려로 눈길을 돌렸는데요. 그것이 바로 서긍이 파견되는 1123년의 사절단입니다.

송 휘종은 1178년에 기존의 신주(神舟) 2척 외에 2척을 더 건조합니다. 여기에 민간 무역선인 객주 6척을 더 동원합니다.

<고려도경>은 ‘신주’의 규모를 구체적으로 적시하지는 않았는데요. 다만 민간 무역선인 ‘객주’의 규모를 아주 상세하게 기록해놓고는 ‘신주의 길이, 너비, 높이, 크기, 집기, 용기, 인원수 등은 모두 객주의 3배’라고 특기해 놓았습니다.

■1000명에 육박한 사신단 수

그럼 객주의 규모를 볼까요.

“객주의 길이는 10여 길(장), 높이는 3길, 너비는 2길 5자이고 2000여 곡을 실을 수 있다. …선원은 1척당 60명 정도 탄다”(<고려도경> ‘객주’)고 했어요. 그렇다면 신주는 길이 30여 길(90여m), 높이 9길(27m), 너비는 7길 5자(24m) 정도가 된다는 얘기입니다.(#주: 실제 신주의 규모는 길이 43m, 높이 13m, 너비 11m 정도라는 견해도 있다.) 또 객주 6척에 선원(1대당 60명)만 360명(6×60명)이 탔다고 했죠. 그럼 객주의 3배라는 신주에도 선원만 360명(2×60×3)이 탔겠죠.

그렇다면 8척(신주 2척+객주 6척)에 승선한 선원만 모두 720명에 이릅니다. 또 <고려도경>에 기록된 공식 사절단 수가 156명인데요. 이것만 해도 876명입니다. 그밖의 수행원까지 합하면 1000명에 달하리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자그마치 900년 전인데요. 송나라가 1000명에 육박하는 대규모 사신단을 고려국에 보냈다는 겁니다.

<고려도경>은 “민간 무역선인 객주의 길이는 10여 길(장), 높이는 3길, 너비는 2길 5자이고 2000여 곡을 실을 수 있다. …선원은 배마다 60명에 이른다”고 했다. /출처: 문경호 교수,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푸른역사, 2023

<고려도경>은 “민간 무역선인 객주의 길이는 10여 길(장), 높이는 3길, 너비는 2길 5자이고 2000여 곡을 실을 수 있다. …선원은 배마다 60명에 이른다”고 했다. /출처: 문경호 교수,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푸른역사, 2023

■<고려도경>은 기행문이 아니다

아무리 봐도 보통 사절단 같지 않죠. <고려도경>은 단순한 기행문이나 풍물지가 아닙니다. 서긍의 ‘서문’을 들여다봅시다.

“구중궁궐 깊은 곳… 천자(황제)는 만 리 밖 사방을 손바닥 위에서 가르치듯 훤히 살펴야 한다.”

“고려는 요동에 자리 잡고 있어서… 가까운 제후국이 아니다. 도적(圖籍·지도와 호적) 작성이 곤란하다.”

“눈 귀가 닿는 대로 널리 일을 탐문하는 것이 사신의 직분이다.”

“고려의 실정을 수집해 사신의 임무를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고자 한다.”

어떻습니까. ‘쌔~’한 느낌이죠. 좋은 말로 ‘정보수집’이고 시쳇말로 ‘스파이 활동’ 같죠.

그렇습니다. <고려도경>에는 58명에 이르는 ‘그다음 보충된 하절(차충대하절)’들의 임무가 적혀 있는데요.

“충대하절은 군인 신분이 많았다. 그러나 이번(1123년 사절단 파견)에는 사인(士人·학문을 닦은 사람)이나 예술인 및 장인들도 뽑았다. 이번 사절의 행차에 고려인을 살피라는 황제의 뜻을 모두 유념했으므로 누구나 고려의 풍속을 살피려고 했다.”

<고려도경>은 “고려인은 은혜를 베푸는 일이 적고, 여색을 좋아하며 쉽게 사랑하고 재물을 중히 여기며 혼인도, 이혼도 쉽게 한다”고 꼬집었다. 그림은 혜원 신윤복의 ‘월야밀회’ /간송미술관 소장

<고려도경>은 “고려인은 은혜를 베푸는 일이 적고, 여색을 좋아하며 쉽게 사랑하고 재물을 중히 여기며 혼인도, 이혼도 쉽게 한다”고 꼬집었다. 그림은 혜원 신윤복의 ‘월야밀회’ /간송미술관 소장

■송나라 스파이 58명의 암약

공식사절단 156명 가운데 무려 58명이 정보수집에 나선 스파이였다는 겁니다. 무술을 익힌 군인, 그림을 그리는 예술인, 측정과 측량을 담당하는 기술인들로 구성됐다는 뜻이죠.

여기서 서긍은 ‘제할예물관’이었는데요. 사신단을 관리하는 직책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서긍이 사절단의 일원으로 뽑힌 다른 이유가 있었죠. ‘시·서·화’에 능했기 때문입니다. 글씨는 물론이고, 산수화와 인물화 모두 ‘신품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평을 들었죠. 서긍 본인은 물론 58명의 ‘스파이’가 수집한 첩·정보를 정리해 글과 그림으로 남기는 작업을 총지휘했습니다.

■감시의 눈 번뜩인 고려

고려 조정은 과연 송나라의 의도를 몰랐을까요. 알았던 것 같습니다.

1123년(고려 인종 원년) 6월 12일 신주 2척을 앞세운 송나라 사절단의 배 8척이 예성항 어귀에 들어섰습니다. 송나라 사신단은 내심 거대한 신주의 규모에 압도당할 고려인들을 상상했겠죠.

더 놀란 것은 송나라 사신단이었습니다. 서긍은 “중무장한 기병과 의장대 등 고려 정예부대 1만명이 도열해 있었고, 구경꾼이 담장처럼 둘러서 있었다.”(<고려도경> ‘예성항’)고 보고했습니다.

그럼 첩·정보 수집 활동은 자유로웠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철저한 통제를 받았습니다. 서긍은 “고려에 겨우 한 달 남짓 머물렀고, 객관 앞에 군사가 지켰다. 사신단이 객관을 나선 게 겨우 5~6번에 불과했다”고 토로했습니다.

서긍은 그런 상황에서도 58명의 스파이 요원이 눈도장, 귀동냥한 것을 토대로 보고서를 작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글과 그림을 곁들인 <고려도경>입니다. 하지만 2년 뒤(1127~1128)에 일어난 ‘정강의 변’(휘종과 그 아들 흠종이 금나라에 잡혀간 사건)-북송의 멸망-남송의 건국 등 난리통에 그림 부분은 사라졌습니다.

<고려도경>은 “멥쌀로 만든 술은 빛깔이 짙고 맛이 진해 쉽게 취하고 빨리 깬다. …고려인들은 술을 좋아한다”고 기록했다. /경기도박물관 제공

<고려도경>은 “멥쌀로 만든 술은 빛깔이 짙고 맛이 진해 쉽게 취하고 빨리 깬다. …고려인들은 술을 좋아한다”고 기록했다. /경기도박물관 제공

■실패로 끝난 사신단의 임무

그렇다면 송나라는 외교적인 성과를 거두었을까요. 사신단장인 정사 노윤적이 “이제 요나라의 운명도 다했으니 송나라의 책봉을 받으라”고 막 즉위한 고려 인종(재위 1122~1146)에게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인종의 반응이 재미있습니다.

“선왕(예종)의 상(喪)을 다 마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책봉을 요청하는 것은 예의상 미안한 일이오.”(<고려사> 1123년 6월 22일) 구구절절한 외교적 수사죠. ‘상중(喪中)’이라는 점을 내세워 완곡하게 거절한 겁니다.

한마디로 최첨단 거함 신주와 1000여명의 대규모 사신단을 앞세워 고려를 자기편으로 만들려 했던 송나라의 외교전은 실패로 끝났던 거죠. 하지만 한 달여의 짧은 기간에 온갖 감시를 받아 가면서 남긴 일종의 첩보보고서가 900년 전 고려와 고려인의 삶을 더듬어볼 수 있는 지침이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lkh07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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