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 시기 국가들은 산업정책에 거리를 뒀다. 코로나19 이후 급부상한 지정학적 고려와 에너지전환 필요성은 산업정책의 국제적 경쟁에 다시 불을 붙였다. 주요 국가들은 반도체와 이차전지 분야에 막대한 보조금을 지불하며 경쟁에 뛰어들었다.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프로그램이 제공하는 향후 10년간의 보조금과 세제 혜택 규모는 3690억달러에 달한다. 유럽연합(EU)의 그린딜(친환경 정책)은 총 6490억유로의 보조금을 포함하고 있다. 일본은 녹색 전환(GX) 추진을 통해 2023년 이후 10년간 보조금으로 40조엔 규모를 제안했다. 중국의 재생에너지 산업에 대한 막대한 국가보조금 규모는 이미 서방 연구기관들이 추정을 포기했을 정도다.
한국은 오랜 산업정책 경험을 가진 나라다. 개발 시기에 금융자원을 국가 주도로 중화학공업 분야에 몰아주었고, 기업이 필요한 입지나 사회 인프라도 다른 분야의 정부지출에 우선해 제공해줬다. 금융자원 배분에 정부 개입이 점차 어려워지면서 이후 세제가 주요 지원수단으로 자리 잡게 됐다.
세액공제와 보조금 지급을 통한 지원
산업정책 수단으로서 재정정책은 세제를 통한 지원과 정부예산을 통한 보조금으로 구분된다. 세제지원은 기업이 자기 자본으로 투자를 했을 때 사후적으로 납부할 세금에서 투자액의 일정 비율을 공제해준다. 반면 보조금은 기업이 투자하기 전에 투자금 일부를 정부가 지원하기 때문에 자금 여력이 부족한 기업도 투자를 할 수 있게 된다. 정부의 재정부담 측면에서는 (보조금 지출이 늘거나, 또는 세액공제로 수입이 줄어) 별 차이가 없다.
지원 수단의 적격성 측면에서는 보조금이 더 우월하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시점까지 성공적인 이익 창출로 투자 여력을 확보하지 못한 회사라도 업종이 미래 경제에 필수적으로 중요한 분야인 경우 정부의 보조금으로 투자가 가능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추격형 경제를 추구하는 단계가 아니다. 주력 제조업 종목에서 우리는 이미 세계를 선도하는 수준에 도달해 있다. 다만 미래에는 어떤 산업 분야에서 중요한 혁신이 이루어지고 고부가가치 창출이 이루어질지 예측하기 어렵다. 불확실하고 역동적인 미래세계에서 기업이 혁신적인 경제활동을 통해 살아남도록 정부가 도와주려면 특정 종목을 염두에 둔 지원은 지양해야 한다.
우리가 채택하고 있는 지원 수단인 세액공제는 지금까지 성공한 기업, 스스로 투자를 할 수 있는 여력이 있는 기업에만 혜택으로 작용한다. 문제는 스스로 투자할 수 있는 여력을 갖추고 있는 기업이라면 국가가 세액공제 등을 통해 도와줘 투자를 지원할 이유가 별로 없다는 점이다. 의미 있는 투자라면 기업 스스로의 판단과 자금으로 투자할 것이고, 의미가 없는 투자라면 그런 투자에 정부가 지원하는 것 자체가 문제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나 EU가 지정학적 고려로 투자유치에 전력하고 있는 반도체, 이차전지 등은 한국 경제의 주력 품목들이다. 국가전략산업으로 지정돼 통합투자세액공제제도가 높은 세액공제율을 제공하는 분야이기도 하다. 이 분야 투자를 미국이나 EU가 원하는 것은 충분하게 이해가 된다. 반도체는 모든 산업의 핵심요소다. 생산을 자국에 유치해 중국과의 지정학적 대결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리스크를 줄여야 한다. 미국은 반도체 생산과정에 중요한 설계, 장비 등 분야에서 기술독점적인 위치에 있으면서 시장 규모도 크다. 때문에 세계의 어떤 반도체 생산업체도 미국의 요구를 뿌리치기 어렵다. 결국 원하는 대로 미국 내 반도체 생산이 이루어지고, 그 분야의 고용도 증가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입장은 그들과 뚜렷하게 구별된다. 미국과 EU에는 반도체와 이차전지 분야 생산입지가 들어서고, 중국은 이에 맞서 독자적인 반도체 생산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경제 규모나 과학기술 수준, 그리고 각국 정부의 확고한 태도에 비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이들 나라에서 지정학적 중요성을 가진 재화의 생산입지는 확보될 것으로 보인다. 이는 장기적으로 세계시장에서 반도체와 이차전지 분야의 공급과잉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과거의 시장점유율을 지키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국내에서 사용할 반도체가 부족하지 않다면 수출 주력산업 분야가 공급과잉이 될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 더 많은 투자를 유도하기 위한 세액공제를 제공한다는 것이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산업정책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지원 방식과 강도, 변화 꾀해야
미래의 산업정책에서는 국가가 지원하는 대상 분야의 선정도 중요하지만, 지원의 강도와 방식에 대해서도 숙고가 필요하다. 미래의 불확실성을 반영해 좁은 영역의 산업이나 기술에 지원의 범위를 한정하는 방식은 지양돼야 한다. 현재 국가전략산업으로 인정돼 지원대상이 되는 산업의 범위는 반도체, 이차전지, 백신, 디스플레이, 수소, 미래형 이동수단, 그 밖에 시행령으로 정하는 분야다. 백신은 중요한 분야지만 바이오와 제약이라는 중요한 산업 분야의 일부분이다. 그렇다고 백신을 제외한 바이오 및 제약 분야에서 미래기술이나 가치 창출이 이뤄지지 않는다고 말하기 어렵다. 반대로 디스플레이라는 특정 품목이 국가전략산업에 규정되는 것 역시 근거가 부족하다.
더 중요한 건, 현재 국가전략산업에 규정된 산업 분야가 대규모 설비투자를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설비투자에 집중되는 정부의 재정지원은 지적재산권이나 인적투자의 중요성이 큰 소프트웨어 산업에 대한 상대적 불이익을 의미한다. 미래에는 하드웨어보다 소프트웨어 산업의 비중이 더 커지고 더 많은 부가가치가 그 분야에서 창출될 가능성이 높다. 국가전략산업의 범위를 넓게 설정하게 되면, 그에 상응해 정부의 지원 강도는 약화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임시투자세액공제제도는 연장이 되지 않도록 하고 국가전략산업에 대한 세액공제 지원은 낮추는 것이 합리적이다.
미래의 중요한 산업 분야에 대해 정부는 지원방식을 세액공제 방식에 그칠 것이 아니라 미국이나 EU의 사례처럼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 경우 공정성이나 도덕적 해이 문제가 발생할 수 있으므로 정부는 보조금 지급의 반대급부를 기업에 요구해야 한다. 기업이 투자를 위한 자체 자금 조달이 어렵다면 필요투자액의 일정비율을 보조금으로 지급해 해결하되, 기업은 일정기간이 지난 후 발생한 이익에서 정부가 지원한 보조금과 같은 비율로 국가에 납부하면 된다. 즉 국가가 투자에 참여한 만큼 이익 배분에도 참여하는 것이다. 기업이 이익을 내지 못하면 정부도 투자를 잘못 결정한 것이므로 투자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김유찬 포용재정포럼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