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렌트>?<드라이 플라워>?<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꾿빠이, 이상>
유난히 기온차가 급격한 올겨울, 어느 때보다 긴 환절기를 지나 연말연시가 되니 주위에 변화가 잇따른다. 부고도 많고 인사이동도 많다. 인생의 희비가 교차하는 시기다. 예상치 않은 굴곡은 오춘기(20대 이후 오는 심리적 위기)를 견인한다. 짜증이 많아지고 작은 일에도 움츠러들며 혼자만의 시간을 고집하게 된다.
뮤지컬 <렌트>의 등장인물 대부분이 그러하다. 크리스마스이브여도 그들에게 닥친 현실적 고난은 우울함을 증폭시킨다. 로저와 마크는 각기 뮤지션과 영화감독이 꿈이지만 당장 세 들어 사는 건물의 재개발로 쫓겨날 위기다. 스트립댄서 미미는 베니와 사귀었지만, 친구 로저에게 더 호감을 보인다. 대학강사이자 동성애자인 콜린은 드래그퀸(여장 남성) 엔젤의 솔직함에 반한다.
여러 캐릭터가 각자의 이야기를 쏟아내는 뮤지컬 <렌트>는 시작부터 북새통이다. 줄거리 없이 캐릭터들 상황만 존재하므로 처음 보는 관객들은 어리둥절하다. 이야기보다는 캐릭터 중심의 분절적 구조여서다. 2막이 시작되면서 “52만 5600분의 귀한 시간들”로 시작되는 렌트의 대표 넘버 ‘Seasons of Love’가 전 출연진에 의해 합창되고 나서야 대다수 관객은 고개를 끄덕이며 몰입한다.
1990년대 말 뉴욕 슬럼가 예술인들의 삶과 사랑을 다룬 <렌트>는 자코모 푸치니의 오페라 <라보엠>을 재해석한 브로드웨이의 명작이다. 작곡가이며 극작가인 조너선 라슨이 자전적 이야기를 더해 제작했으나 1996년 초연 개막 전날 요절해 더 긴 여운을 남긴다. 한국에서는 2000년 초연 이후 2023년이 아홉 번째 시즌이다.
동성애와 에이즈 등 소재의 파격이 대두됐던 과거의 <렌트>와 달리 2023년 <렌트>는 끈끈한 우정이 돋보인다. 넘버 ‘Finale B’ 이후 극 중 다큐멘터리를 찍던 마크 역 배우가 휴대용 영사기를 공연장 전체에 돌리고 죽은 엔젤이 무대 위로 뛰어나온다. 순간 출연 배우들의 실제 연습 장면이 무대 정면과 공연장 전체에 영사되는 장면은 <렌트>의 하이라이트다.
이재은 협력 연출은 “무대 위에서 그들이 살아가는 것과 이 작품을 보는 관객들이 현실에서 살아가는 것, 그것을 재현하고 있는 배우들이 살아가는 것이 결국 모두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라며 극 중 캐릭터가 아닌 배우 한명 한명의 실제 삶에 집중한 영상으로 <렌트>의 대미를 장식한 배경을 전했다. 이 연출은 또 “연습 과정에서 렌트 속 캐릭터들처럼 일상을 자세히 공유하고 사적 고민과 고통을 나누는 시간을 갖는다. 출연진 모두 <렌트> 속 캐릭터처럼 절친이 되고 각자의 문제의식이 작품에 스며들게 하는 중요한 시간이다”라고 덧붙였다.
창작 초연 뮤지컬 <드라이 플라워> 출연진들의 연습 과정도 <렌트>와 닿아 있다. 시공간을 교차하는 청소년들의 음악적 연대를 다룬 <드라이 플라워>는 2023년 학생들의 기타 3인조 밴드와 1983년 학생들의 하모니카 피아노 이중주의 교감이 곧 작품 속 세계관이다. 배우들의 라이브 연주가 필수라 기획단계부터 기타와 하모니카, 피아노 연주가 가능한 배우들을 캐스팅했다. 출연진들은 악기가 손에 붙어 안무와 노래가 저절로 묻어나도록 기초부터 악기 레슨을 다시 받았다. 정철 연출은 “8개월 가까이 악기를 연습하며 각자의 고3 시절을 공유하고 음악에 몰입했던 기억을 끄집어내길 반복하면서 저절로 속내를 공유하는 절친이 됐다”며 “대학로 소극장 뮤지컬 제작환경에서 불가능한 시도지만 가장 예민하고 아름다운 청소년 시절의 음악적 교감이 작품의 핵심이므로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다”라고 설명한다.
오랜 시간 속내를 공유한 배우들은 캐릭터에 그 시간을 녹여내 무대 위 라이브 연주를 통해 확장해간다. <렌트>처럼 캐릭터 중심인 작품이라 각자 주어진 상황에서 음악을 논하고 악기를 연주하는 일이 전부다. 음악으로 분출하는 그 시절에만 유효한 감정의 소용돌이는 그대로 관객들에게 전이된다. 미성년과 성년의 경계에 있는 등장인물 5명의 내재된 감정은 이에 공명하는 친구들과의 맥락 없는 대화와 에너지 넘치는 라이브 연주를 통해 관객들을 그때 그 시절로 타임슬립하게 이끈다. 음악이 타임머신인 대표적 밴드 뮤지컬이다.
캐릭터에 과몰입돼 기타를 연주하는 <드라이 플라워>의 등장인물들이 무대 위에서 친구들과 장난치는 장면은 뮤지컬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의 눈싸움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절친인 토마스와 앨빈은 둘 중 남는 사람이 떠난 사람의 송덕문(頌德文)을 쓰기로 약속한다. 책방을 운영하던 앨빈의 아버지가 떠나고 앨빈은 계속 마을에 남아 책방을 물려받는다. 토마스는 도시 대학에 진학해 유명 작가가 되고 앨빈 아버지의 송덕문을 쓰지만, 앨빈과 의견차로 낭독하지는 못한다. 고인의 일상을 진솔하게 담아 송덕문을 전한 앨빈과 달리 된 토마스는 격식에 사로잡혀서다.
갑자기 앨빈이 죽고 혼자 남아 앨빈의 송덕문을 쓰는 토마스는 4차원에 천진했던 앨빈과 함께했던 어린 시절부터 며칠 전까지의 수십 년을 돌이킨다. 동네 친구들과의 눈싸움, 사춘기의 돌발 행동, 입시를 앞두고 진로를 정하며 서로 생각이 달라 갈등하던 순간들, 유명 작가가 된 후 절친 앨빈이 조금은 귀찮았던 기억 등. 앨빈과의 어린 시절에서 영감을 얻어 작가가 된 토마스의 회환은 관객들의 기억도 끄집어낸다. ‘우정에 대한 공동의 기억’은 무대 위에 그대로 구현된다. 책이 가득한 오래된 책방을 배경으로 어린 시절 눈싸움이 재현되는 폭설 장면은 이 작품의 하이라이트다.
뮤지컬 <꾿빠이, 이상>은 작품 자체가 천재시인 이상에게 전하는 후세와 이상 주변인들의 송덕문이다.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가 앨빈의 장례식으로 시작됐듯이 이 작품도 관객들이 데스마스크를 쓰고 이상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상의 여러 정체성을 대변하는 3명의 이상과 13명의 이상 지인이 등장해 이상의 삶과 그의 작품 중 난해하기로 유명한 시 ‘오감도’를 되새김한다. 관객들은 입장 시 데스마스크를 착용하고 이상의 장례식에 동참해 그의 모호한 이미지를 구체화하는 90분의 여정에 합류하는 관객 참여형(이머시브) 작품이다.
이상과 그 주변인들로 분한 배우들의 신체와 선, 발성과 노래, 호흡과 땀방울이 배우들의 동선에 자리한 관객들에게 그대로 전이되며 관객들의 오감으로 확장된다. 천장에서 쏟아지는 스크린과 사방의 벽에 영사되는 조형적이며 모호한 이미지와 ‘오감도’ 텍스트가 미디어아트를 방불케 한다. 16명 배우의 퍼포먼스와 9명 오케스트라의 라이브 연주에 어우러져 오렌지색 오브제에 앉아 데스마스크를 착용한 관객들은 혼돈 속 몰입을 통해 이상과 자아의 경계를 넘나든다. 김연수 원작의 장편소설 <꾿빠이, 이상>을 모티브로 했으나 뮤지컬 <꾿빠이, 이상>은 모호함이라는 인간의 본질을 더 탐구하고 있다.
우정을 깊이 있게 다루는 이 작품들은 공감과 정서를 관객들이 직관적으로 수용하도록 출연진 모두 오랜 시간 공들여 서로를 알아가고 심연을 공유하는 과정을 거쳤다. 연말연시 너무 바빠 오랜 친구를 소홀히 했다면 이 작품들이 던진 다양한 화두에 대해 사유하며 연말연시를 보내면 어떨까. <렌트>는 내년 2월 25일까지, <드라이 플라워>는 1월 7일까지,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는 2월 18일까지 공연한다. <꾿빠이, 이상>은 12월 17일까지다.
<이주영 문화칼럼니스트·영상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