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여유가 만드는 인간의 품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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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나이 예순을 넘으니 되고 싶은 게 생겼다. 학창 시절 ‘장래 희망’란에 써넣은 게 있었지만, 그건 그저 전시(展示)용 꿈이었을 뿐. 이제 비로소 현재 희망이 생겼다. 그건 바로 품격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내가 어감에서 느끼는 품위와 품격은 다르다. 품위는 교양 수준이나 문화적 발전단계와 관련이 있고, 품격은 그야말로 한 사람의 인품을 가리키는 것 아닐까. 품위의 위(位) 자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일정한 기준에 의해 매겨진 등급이나 등수를 의미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내게 품위는 오르지 못할 나무와 같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일 수도 있고. 하지만 품격의 격(格)은 다르다. 주위 환경이나 형편에 자연스레 어울리는 분수를 뜻한다. 한마디로 격은 옳고 그름도, 높고 낮음도 아니다. 자기에게 맞으면 된다.

내가 만나본 사람 중에 품격 있는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KBS라디오 <강원국의 지금 이 사람>에서 만난 시니어모델 윤영주씨다. 그에게선 부드러우면서도 당당한 기품이 느껴졌다. 칠순을 훌쩍 넘어 머리는 백발이나, 온화한 미소와 고고한 자태가 우아함 그 자체였다. 어찌해야 이처럼 품격이 느껴질까. 품격은 여유가 아닐까? 경제적·정신적·시간적 여유에서 나오는 게 품격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여유 있는 삶의 조건은 무엇인가.

첫째, 겸손이다. 스스로를 낮춰야 여유가 생긴다. 원래의 나는 80인데, 남들에게 60으로 보이면 20만큼 여유가 생긴다. 80인 내가 60인 것처럼 보이는 게 겸손이다. 모든 문제는 60인 사람이 80으로 보이려 하는 데서 비롯된다. 사람들은 그가 60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한두 사람에게 한두 번 80으로 보일 순 있으나 일상적으로는 불가능하다.

60인 사람이 80으로 보이려 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가. 60밖에 안 된다는 걸 들킬까봐 늘 불안하고 초조하다. 모든 사안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자신에 대한 평가에 예민하다. 무엇보다 80으로 보이기 위해 아등바등한다. 현재의 자신을 긍정하지 않으므로 남과의 경쟁에서라도 반드시 이겨야 한다. 여유가 있을 수가 없다.

겸손한 사람은 무던하고 덤덤하다. 80인 사람이 60만큼만 보여주려고 하면 20을 비우고 내려놓은 것이다. 60에 자족하고 감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사람은 60만 보여주는 데서 절제의 희열을 맛본다. ‘너희들, 내가 60으로 보이지? 실은 80이야.’ 가슴에 품은 20만큼 뿌듯하고 당당하다. 어지간한 실패에 기죽거나 동요하지 않는다. 남의 평가에 위축되거나 흔들리지도 않는다. 늘 의연하다. 이런 사람을 만나면 편안하다.

뿐만 아니라 겸손한 사람은 배우려는 자세를 견지한다. 누구를 만나건 그 사람에게서 배울 점을 찾는다. 또한 스스로를 모자란 사람이라 여기기에 매사에 심사숙고한다. 사려 깊고 진중하게 처신하니 깊은 매력이 우러난다.

둘째, 경청이다. 여유 있는 사람은 말이 급하거나 빠르지 않다. 자분자분 말한다. 말을 해야 한다고 조바심내지도 않는다. 말하지 않아도 상대가 나를 알아줄 것이라고 믿는다. 대화하다가 자기가 아는 게 나오면 어떻게든 아는 체하려 하거나,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내 편으로 만들려고 안간힘 쓰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대신 잘 듣는다. 잘 듣는다는 의미는 귀가 열려 있다는 뜻이다. 잘 듣는 사람은 열린 사고를 한다. 생각이 유연하고 개방적이다. 이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과 각기 다른 삶의 방식이 있다는 걸 인정하고 존중한다. 또한 잘 듣는 사람은 상대 입장을 배려하고 세상 사람과 협력하고자 한다. 특히 약자를 배려한다. 센 사람 앞에서 쫄지 않고 약자 앞에서 폼 잡지 않는다. 주변 사람 모두를 동등한 인격으로 대우하며, 그들과 더불어 공존의 길과 상생의 방법을 찾는다. 잘 듣는 사람은 또한 자신의 모자란 부분에 대한 지적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잘못을 변명하거나 약점을 감추려 하지 않는다.

셋째, 친절이다. 강자의 불손은 오만이다. 약자의 공손도 비굴일 수 있다. 여유에서 비롯된 친절이야말로 강자가 지녀야 할 태도다. 브라이언 헤어와 버네사 우즈는 그들이 쓴 책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에서 “네안데르탈인보다 신체적·지적 능력이 열등한 호모사피엔스가 지구의 지배종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은 친화력에 있다”고 말한다. 여유 있는 사람은 다정하다. 또 다정하려면 여유가 있어야 한다. 친절은 여유에서 나온다. 친절한 사람은 공손하고 예의 바르다. 말과 행동을 함부로 하지 않고 가려서 한다. 상대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

친절한 사람은 감정이 죽 끓지도 않는다. 감정의 기복은 누구나 겪지만, 여유 있는 사람은 감정이 끓어오르는 임계점이 높아 대체로 평온한 상태를 유지한다. 속으론 요동칠지언정 평정심을 잃지 않는다. 겉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경우에도 서서히 반응한다. 관대하고 느긋하다. 그렇다고 자기다움을 포기하진 않는다. 분명한 소신이 있고, 무례와 몰상식에는 단호하게 대처한다. 공사를 구분하는 분별력도 있어 남에겐 관대하고 자신에겐 엄격하다.

끝으로, 성장이다. 결핍과 지체 상태에서는 여유를 갖기 어렵다. 여유롭기 위해서는 가진 게 많아야 한다. 그래야 가진 것 중에 일부만 보여주는 겸손을 부릴 수 있다. 남을 받아들이는 경청도 자신의 그릇이 커야 가능하다. 친절 역시 남에게 베풀 수 있는 에너지와 역량을 갖춰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겸손은커녕 자신을 포장하기에 급급해 가식을 일삼으며, 경청은 고사하고 방어와 공격, 지배와 복종이란 분란 속에 산다. 당연히 친절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겉과 속의 차이가 없고, 혼자 있을 때와 함께 있을 때가 다르지 않으려면,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남에게 베풀면서 살려면 멈춰 있어선 안 된다. 하루하루 새로워지고 나다워져야 한다.

자기 성장을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한다. 일상을 단순화하고 본질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인간관계도 자신과 결이 맞는 사람으로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래야 시간적 여유를 갖고 휴식 시간을 확보하면서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

이쯤 되니 이번 생애에 온전한 품격을 갖추기는 어려울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러면 어떤가, 예순 넘어 되고 싶은 꿈이 생겼고, 그걸 이루기 위해 달려가는 삶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강원국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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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최정예 겁쟁이들
오늘을 생각한다
대한민국 최정예 겁쟁이들
제2차 세계대전 전범의 아들 노다 마사아키가 쓴 <전쟁과 죄책>에는 포로의 목을 베라는 상관의 명령을 거부한 병사의 이야기가 나온다. 일본 관동군 중대장으로 근무했던 도미나가 쇼조의 증언에 따르면 중국 후베이성에서 포로를 베는 ‘담력’ 교육 도중 한 초년 병사가 “불교도로서 할 수 없습니다”라며 명령을 거부했다. 불교도로서 ‘살생하지 말라’는 계율을 지키려 했던 이 병사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홀로코스트 연구자 크리스토퍼 R. 브라우닝이 쓴 <아주 평범한 사람들>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학살 임무를 거부하고 총기를 반납한 나치 대원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독일 101예비경찰대대 빌헬름 프라프 대대장은 유대인 학살 임무에 투입되기 직전 병사들에게 “임무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면 앞으로 나오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10명 남짓 병사가 앞으로 나왔고, 그들은 소총을 반납하고 대기했다. 그 병사들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각 부대에서 학살 임무를 거부한 병사와 장교들이 속출했지만, 나치 독일의 가혹했던 군형법은 이들에게 명령불복종죄를 비롯한 어떠한 형사처벌이나 징계도 내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