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비틀스와 다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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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21일(현지시간) 영국을 국빈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이 런던의 의회인 웨스트민스터궁 로열 갤러리에서 연설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11월 21일(현지시간) 영국을 국빈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이 런던의 의회인 웨스트민스터궁 로열 갤러리에서 연설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주 순방길에 오르는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1월 영국을 방문해 의회에서 한 연설이 화제다. “영국엔 비틀스와 베컴이, 한국엔 BTS와 손흥민이 있다”는 그의 한 마디로 의회는 웃음바다가 됐다. 발언의 전문은 “영국이 비틀스, 퀸, 해리 포터, 그리고 데이비드 베컴을 가진 나라라면, 한국은 BTS, 블랙핑크, <오징어게임>, 그리고 손흥민을 가진 나라”이니, 양국이 가진 문화의 매력을 바탕으로 서로 협력하고 인적 교류를 하자는 내용이었다.

다음날 열린 한-영 최고과학자 과학기술 미래포럼에 참석한 윤 대통령은 “과학자들의 도전과 헌신이 인류 문명의 근간이 됐으며, 과학은 늘 인류 공동의 번영과 협력을 지향한다”고 강조한 후, 특히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면 더 멀리 볼 수 있다”는 아이작 뉴턴의 말을 인용해 양국의 최고 과학자들이 양국의 젊은 연구자들에게 거인의 어깨가 돼줄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대통령이 과학에 관심을 갖는다는 건 좋은 일이다.

영국은 위대한 인물로 과학자와 공학자를 꼽는다

문제는 이런 대통령이 불과 몇 달 전 한국 과학계 전체를 카르텔로 규정하며 역사상 전무후무한 연구개발예산 삭감을 감행했다는 데 있다. 대통령의 그 한 마디로 공무원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고, 향후 여론이 악화하자 사태를 무마하려 애쓰고 있지만, 이미 지른 불이 꺼질 것 같지는 않다.

가장 중요한 건 과학기술에 대한 투자가 짧게는 30년에서 100년을 가정한다는 점이다. 대통령의 한 마디에 예산의 25%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연구환경에서 연구하고 싶어할 학문후속세대가 있다면, 그는 진정한 애국자일 것이다. 대통령의 연구카르텔이라는 한 마디와 이후 벌어진 사건들은 당장 내년의 연구개발이 아니라 한국이 과학기술의 패권국이 될 수 있는 씨앗을 먹어버린 것과 같다. 윤 대통령은 한국 과학기술의 뿌리를 뽑아버린 정치리더로 기억될 가능성이 크다.

대통령은 영국을 비틀스의 나라라고 불렀지만, 언젠가 BBC가 선정한 위대한 영국인의 1위는 정치인 윈스턴 처칠이었고, 비틀스의 존 레넌은 8위에 불과했다. 그리고 생물학자 찰스 다윈이 4위, 물리학자 아이작 뉴턴이 6위에 이름을 올렸다. 즉 영국인들은 자신의 나라가 위대한 이유를 과학에서 찾는다는 뜻이다. 물론 5위에 윌리엄 셰익스피어라는 문호가 이름을 올렸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인물은 2위에 이름을 올린 이점바드 킹덤 브루넬이다.

아마 대부분의 한국 사람에게 생소할 브루넬은 19세기 산업혁명의 시기 영국 최고의 엔지니어로 칭송받는 인물이었다. 다윈이 <종의 기원>을 출판하는 1859년 사망한 브루넬은 지금도 사용되는 템스강 하저 터널 공사를 지휘했고, 새로운 공법을 개발해 수많은 현수교를 건설했을 뿐 아니라 영국을 관통하는 철도망과 대서양을 횡단할 수 있는 초대형 증기선을 개발했다. 브루넬의 상상력 덕분에 영국은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었던 셈이다. 영국의 위대함은 과학과 공학에서 나왔다. 영국인들은 존경하는 과학자와 엔지니어의 이름을 안다.

한국엔 기억할 만한 과학기술자의 이름이 없다

윤 대통령이 영국 의회에서 뉴턴과 다윈 그리고 브루넬의 이름을 말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제대로 된 과학기술참모 하나 없이 검찰 출신만 가득한 청와대에서 그런 식견 있는 연설문이 등장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문제는 만약 대통령이 영국 과학기술자들의 이름을 불렀더라도, 한국에서 짝으로 부를 만한 인물이 없다는 데 있지 않을까 싶다. 비틀스엔 BTS를 베컴엔 손흥민을 어떻게 가져다 붙였지만, 과연 뉴턴과 다윈 그리고 브루넬에 비견될 한국의 과학기술자로 누구를 지목할 수 있었을까.

물론 17세기 뉴턴 이래 19세기 근대과학혁명의 기틀을 만들어온 영국과 20세기 중반이 돼서야 겨우 근대과학이 무엇인지 알게 된 한국을 비교하는 건 무리일지 모른다. 수백 년의 과학기술 역사를 지닌 영국에 비한다면, 그나마 한국은 초고도 성장을 통해 빠르게 과학기술의 경쟁력을 세계 10위권으로 끌어올린 몇 안 되는 국가다. 그리고 브렉시트 이후 과학기술경쟁력을 점차 잃어가는 영국을 바라보며 우리가 배워야 하는 교훈은, 과학기술의 선도국가 지위는 역사적으로 항상 변화해 왔다는 점일지도 모른다.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독일이 주도하던 17~19세기의 근대과학과 산업혁명은 20세기 미국과 일본으로 주도권이 넘어갔고, 현재는 중국으로 축이 옮겨가는 중이다. 역사적 교훈은 국가와 민간의 주도로 과학기술 연구개발이 끊임없이 지원되지 않는다면, 과학기술 패권 경쟁에서 주도권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점이다. 전 세계에서 현재 과학기술에 가장 큰 투자를 하는 국가는 중국이다. 반면 한국은 그 투자를 멈추겠다는 발상을 시작했다. 역사에 진실이 녹아 있다면, 한국의 미래는 별로 밝지 않다.

그리고 한국 과학계엔 어른이 없다

한국에서도 과학기술계 리더들이 이번 윤 대통령의 영국 방문에 동행한 모양이다. 연구개발비 삭감으로 난장판이 된 한국 과학기술계의 리더들이 과연 과학기술의 나라 영국에 대통령과 동행해 무슨 말을 했는지 찾아봤다. 누구도 한국 연구개발비 삭감 이야기를 하지는 않은 듯 하다. 한국 과학기술계를 대표하는 단체는 과총이다. 윤석열 정부의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부의장은 직전 과총의 회장이었다. 과학기술이 국정철학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한국 과학기술계의 리더는, 대통령의 연구비 카르텔 발언에 대해 “누군가는 해야”하는 일이라고 말했고, 과총은 연구개발비 삭감에 대해 그 어떤 논평도 하지 않았다.

중국에서 과학자로 일하면서 가장 크게 놀라게된 부분은, 중국 과학기술생태계의 발전을 위해 공개적으로 과학기술계의 구조와 개혁에 대해 발언하는 과학계의 리더십을 발견한 것이다. 중국에선 내노라 하는 과학적 성과를 보유한 존경받는 리더들이, 자신들이 겪은 불평등과 불공정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과학자로 이미 존경받는 이들만이 리더로 존중받으며, 그런 이들이 각자의 연구소와 대학에서 개혁에 앞장선다. 그리고 40대의 젊은 과학기술계 리더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으며, 한국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진취적이고 개혁적인 모습이 과학기술생태계에 퍼지고 있었다. 과학기술계 스스로가 자정하고 리더를 만드는 상황에서, 국가지도자 역시 그들을 존중하지 않을 도리는 없다. 영국도 독일도 미국도 중국도, 과학기술이 발전하던 시기엔 과학기술계의 건강한 생태계를 위해 희생하던 리더가 있었다. 하지만 우리에겐 기억할 과학기술자가 없고, 따라서 어른도 없다. 그게 한국 과학기술계가 가장 슬퍼해야 하는 일이다.

<김우재 낯선 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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