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사자 정치’로 균열 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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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 인권 비정부기구(NGO) ‘이퀄리티 텍사스’ 활동가 미란다 우드(왼쪽)와 브래드 프리쳇이 지난 10월 25일(현지시간) 미국 텍사스 휴스턴공립도서관에서 주의회가 통과시킨 성소수자 차별 법안들에 맞서 벌여온 활동을 소개하고 있다. 박하얀 기자

성소수자 인권 비정부기구(NGO) ‘이퀄리티 텍사스’ 활동가 미란다 우드(왼쪽)와 브래드 프리쳇이 지난 10월 25일(현지시간) 미국 텍사스 휴스턴공립도서관에서 주의회가 통과시킨 성소수자 차별 법안들에 맞서 벌여온 활동을 소개하고 있다. 박하얀 기자

“What’s your pronoun?”(“어떤 대명사를 쓰시나요?”)

지난 10월 출장차 찾은 미국에서 만난 이들에게 어렵지 않게 들은 질문이다. 지정 성별이 여성인 이는 자신을 ‘he/him(그)’으로 지칭했다. ‘여성’과 ‘남성’으로 나뉜 성별 이분법이 자신의 정체성을 오롯이 담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they/them(그들)’을 썼다. 이는 정의‘되기’에서 정의‘하기’로, 당사자를 객체에서 주체로 옮겨놓는 작업으로 다가왔다.

당사자가 주체가 되어 말하기는 차별에 대항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공화당 우세인 텍사스 주의회는 성소수자 차별 법안을 연이어 통과시키고 있다. 트랜스젠더 청소년의 호르몬 치료 등 성확정 의료서비스를 금지하는 법안부터 학교에서 성소수자 인권 교육을 없애고 대학 운동선수가 지정 성별로만 경기에 참여하도록 하며, 드랙쇼를 사실상 제한하는 법안 등이다.

드랙 아티스트들은 드랙쇼를 제한하는 법률의 시행을 앞두고 시민단체들과 연대해 항의성 공연을 했다. 성확정 의료가 위협받자 성소수자 자녀를 둔 부모들은 자녀를 지지함으로써 생명을 구한 이야기를 공유했다. 성소수자 인권 비정부기구(NGO) ‘이퀄리티 텍사스’의 활동가 브래드 프리쳇은 당사자의 말이 갖는 힘에 대해 말했다. “한 사람이 공감을 주는 이야기를 하면 ‘다시 한번 이야기 해달라’는 반응이 돌아와요.” 혐오해도 그만인 ‘누군가’에서 내 곁에 이미 있는, 혹은 더 있을지도 모르는 구체적인 ‘얼굴’로 드러나는 순간들이다.

백래시가 일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과 텍사스는 맞닿는 지점이 있다. 정부는 내년도 예산안에서 ‘중증장애인 지역맞춤형 취업 지원’, ‘권리 중심 공공일자리’ 등 장애인 일자리 사업 예산을 전액 삭감했다. 구어소통 능력으로 자립 역량을 재단하고 ‘시설 생활’이라는 선택지만 쥐여주는 기조가 굳어질 조짐도 보인다. 내년도 여성가족부 예산안에서 여성폭력 방지와 피해자 지원 예산이 모두 120억3300만원 삭감됐다. 생활동반자법, 혼인평등법 등 가족을 구성할 권리를 보장하는 법안이 지난 5월 국회에서 발의됐고 현행법 테두리 바깥에 있는 가족도 법률로써 보호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지만, 정치인들의 혐오 언동 속에 진전은 없다.

억압받는 이들이 자원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몸’이다. 존재를 드러내 보이고 말하기를 이어간다. 발달장애인인 문석영 피플퍼스트서울센터 활동가는 지난 10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에 출석해 동료 지원가가 돼서야 비로소 “내가 쓸모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고 했다. 25년간 시설에서 살고 10년간 반짇고리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했을 때 겪은 차별과 배제와는 다른, 환대와 자립의 감각이었다. ‘모두의결혼’은 11월 22일 혼인평등법 제정을 촉구하며 동성혼 법제화 서명운동을 시작했고, 여성단체들은 같은 달 24일 거리로 나서 “여성폭력 피해자 지원에 심각한 문제를 초래한다”며 정부 정책 기조를 비판했다.

퇴행이 거듭되는 시기를 어떻게 보내야 할까. 곳곳에서 목소리를 내며 분투하는 이들에게 텍사스 활동가 미란다 우드의 말을 전한다. “때로는 이런 바보 같은 것들이 상황을 더 좋아지게 만들기도 해요. 정부가 그에 대한 반사작용이 더 크게 나타나는 것을 모르고 바보 같은 일을 할 때가 있거든요.”

<박하얀 기자 whit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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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의 역경루
오늘을 생각한다
용산의 역경루
공손찬은 중국 후한 말 북방민족들이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 정도로 위세를 떨쳤던 화북의 군벌이다. 오늘날 베이징 근처 유주를 근거지로 세력을 키웠던 공손찬은 백마의종이라는 막강한 기병대를 중심으로 황건적과 만리장성 넘어 이민족들을 토벌하며 군세를 넓혀갔다. 탁월한 군사적 재능을 갖췄으나 성품이 포악했던 공손찬은 폭정을 일삼으며 민심을 크게 잃는다. 왕찬이 기록한 <한말영웅기(漢末英雄記)>에 의하면 공손찬은 자신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본다는 이유로 부하를 죽이는가 하면 유능한 관료들을 쫓아내고 점쟁이를 측근에 등용하는 등 막장 행각을 벌였다. 하루는 백성들 사이에서 덕망 높았던 관리 유우를 저자에 세워놓고 ‘네가 천자가 될 인물이라면 비가 내릴 것이다’라고 말한 뒤 비가 내리지 않자 그 자리에서 죽여버렸다. 분개한 수만의 유주 백성들은 유우의 아들과 합세해 공손찬을 공격했고, 라이벌 원소와 이민족들까지 연합해 공격하니 공손찬은 고립무원에 처한다. 사방이 포위된 공손찬은 기주 역현에 거대한 요새를 짓고 농성에 들어가니 이 요새가 역경성이다. 자신의 남은 전력을 요새 건설에 쏟아부은 공손찬은 “300만석의 양곡을 다 먹고 나면 천하정세가 달라질 것이다”라고 말하고 외부와 연락을 끊은 채 향락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