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청조와 디스패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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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시절 교문 앞에 담배를 파는 슈퍼마켓이 있었다. 슈퍼 아저씨는 교복 입은 학생들한테 거리낌 없이 담배를 팔았다. 하지만 아저씨에게는 두 가지 확고한 원칙이 있었다. 하나는 일제 담배를 팔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여학생에게는 담배를 팔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일본 담배 마일드세븐을 달라고 했다가는 아저씨에게 한바탕 호통을 들어야 했고, 담배를 사려는 여학생들은 지나가는 남학생들에게 구입 대행을 부탁해야 했다.

[오늘을 생각한다]전청조와 디스패치

지난 10월 25일 디스패치는 “남현희 예비 신랑은 여자”라는 내용의 단독기사를 보도하면서 기사 말미에 이렇게 덧붙였다. “전청조가 일론 머스크와 펜싱을 하든, 트위터에 글을 올리든, 상관없다. 하지만 체육 및 예절 교육 사업을 노린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이것이 바로, ‘디스패치’가 전청조의 실체를 밝히는 이유다.”

디스패치의 단호한 ‘기사 작성 원칙’을 보고 담배 가게 아저씨의 독특한 도덕률이 떠올랐다. 내가 비록 학생들에게 담배를 팔아 먹고살지만 여학생들이 건방지게 담배를 피우는 꼴은 결코 용납하지 못하는 ‘개념’ 남성이며, 적국 일본을 이롭게 하지 않는 애국자라는 자부심. 우리가 비록 비열한 가십 기사로 먹고사는 매체지만 나름의 ‘공익정신’ 같은 걸 갖고 있다는 자부심. 도덕 없이는 살아도 명분 없이는 못 사는 자들의 초라함.

담배 가게 아저씨는 자기가 부끄러운 어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런저런 세부 원칙이 필요했다. 일제 담배를 팔지 않는다는 원칙은 학생들에게 국산 담배를 팔기 위한 원칙이었고, 여학생들에게 담배를 팔지 않는다는 원칙은 남학생들에게 담배를 팔기 위한 원칙이었다. 자신들이 파파라치라는 걸 잘 알고 있는 디스패치에는 취약성을 감출 구실이 필요하다. 본인이 ‘거짓말쟁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던 이명박은 “우리 집 가훈은 정직”이라는 알리바이가 필요했다. 디스패치의 로고 위에는 “뉴스는 팩트다!”라는 슬로건이 걸려 있다. 이명박도 어떤 면에서는 정직했을 것이다. 디스패치가 스타의 사생활이라는 ‘팩트’에 충실한 것처럼.

아저씨의 원칙이 국민 보건 증진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본인 삶의 부끄러움을 이겨내는 데 어느 정도 기여했음은 짐작할 수 있다. 디스패치가 실제로 공익에 기여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독자의 관음증에 죄의식을 덜어주는 데는 기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디스패치는 과거 사생활 침해 비판에 대해 “스타들의 사생활 노출은 일종의 ‘팬 서비스’ 개념이며 팬들의 사랑으로 유명해져 수십억원의 수입을 올리고 있는데 자기 사생활까지 지키겠다는 것은 욕심”이라고 밝힌 바 있다.

묻고 싶다. 파파라치 활동으로 엄청난 수입을 올리면서 ‘공익매체의 자부심’까지 챙기려는 것은 지나친 욕심 아닌가?

<정주식 ‘토론의 즐거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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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최정예 겁쟁이들
오늘을 생각한다
대한민국 최정예 겁쟁이들
제2차 세계대전 전범의 아들 노다 마사아키가 쓴 <전쟁과 죄책>에는 포로의 목을 베라는 상관의 명령을 거부한 병사의 이야기가 나온다. 일본 관동군 중대장으로 근무했던 도미나가 쇼조의 증언에 따르면 중국 후베이성에서 포로를 베는 ‘담력’ 교육 도중 한 초년 병사가 “불교도로서 할 수 없습니다”라며 명령을 거부했다. 불교도로서 ‘살생하지 말라’는 계율을 지키려 했던 이 병사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홀로코스트 연구자 크리스토퍼 R. 브라우닝이 쓴 <아주 평범한 사람들>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학살 임무를 거부하고 총기를 반납한 나치 대원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독일 101예비경찰대대 빌헬름 프라프 대대장은 유대인 학살 임무에 투입되기 직전 병사들에게 “임무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면 앞으로 나오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10명 남짓 병사가 앞으로 나왔고, 그들은 소총을 반납하고 대기했다. 그 병사들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각 부대에서 학살 임무를 거부한 병사와 장교들이 속출했지만, 나치 독일의 가혹했던 군형법은 이들에게 명령불복종죄를 비롯한 어떠한 형사처벌이나 징계도 내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