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박제된 독립운동가들 21세기 청년으로 환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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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곤 투모로우>·<22년 2개월>·<제시의 일기>

뮤지컬 <곤 투모로우>PAGE1 제공

뮤지컬 <곤 투모로우>PAGE1 제공

독립운동가들 이야기는 대부분 신화적이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 자신과 가족을 희생한 처절한 삶이 대두된다. 위인전기가 그러하듯 공(功)만 가득하다. 국가가 정해놓은 방향성에 맞춰 윤색된 경우도 많다.

그들도 인간이다. 나라가 주권을 잃고 헤매던 수십 년간 독립운동가들도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성장하고 좌절했다. 정치적인 이유로 잣대를 달리하고 새삼스레 과(過)를 논하기 전에 그들이 겪었을 인간적인 고뇌와 삶의 자락을 찬찬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마침 독립운동가들의 인간적 면모에 돋보기를 들이댄 작품들이 상연 중이다. 창작 뮤지컬 <곤 투모로우>(Gone Tomorrow)는 김옥균과 고종을 중심으로 갑신정변(1884)부터 경술국치(1910)까지를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상상을 더해 다루고 있다. 주권 학살을 함의하는 고종과 궁인들의 상복 같은 의상과 무대예술은 제목 <곤 투모로우>에 담긴 허무주의와도 상통한다.

삼일천하로 혁명에 실패한 급진 개화파 김옥균은 일본 망명 중에 청나라로 향하다가 고종의 지시로 주살된다. “죽어서 산다”는 유언을 가상인물 한정훈에게 남기며 독립의 대업을 계승케 한 김옥균은 부관참시(剖棺斬屍)당해 팔도에 효수되기에 이른다. 천을 활용한 거대한 형상을 무대 중앙에 매달아 예술적으로 이를 시각화했다. 이때 고종이 부르는 ‘내가 너를 어여삐 하였거늘’은 경술국치 당시 한정훈이 친일파를 저격하며 부르는 ‘조선의 붕괴’와 함께 대표적인 넘버로 꼽힌다.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과 연이은 관동대학살이 배경인 창작 초연 뮤지컬 <22년 2개월>은 독립운동가 부부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한국 이름 박문자)에 주목한다. 경술국치 이후 민중이 독립운동에 본격 참여하며 촉발된 1919년 3·1만세운동은 국내외로 빠르게 전파됐다. 평화적 시위를 무력 진압한 일제의 탄압은 무장독립운동을 견인하는 결과를 낳았다. 만세운동에 참여한 엘리트 청년 박열은 일본으로 피신해 흑우회, 불령사(不逞社) 등 비밀 결사대의 일원이 된다.

뮤지컬 <22년 2개월> 아떼오드 제공

뮤지컬 <22년 2개월> 아떼오드 제공

뮤지컬 <제시의 일기>네버엔딩플레이 제공

뮤지컬 <제시의 일기>네버엔딩플레이 제공

굵직한 실제 사건 사이에 가상의 이야기를 넣은 뮤지컬 <22년 2개월>을 관통하는 정서는 혼돈의 시대에도 희망을 잃지 않은 청년들에 대한 경이로움이다. 중소극장의 메커니즘을 잘 활용한 관동대지진 장면은 객석이 진동할 정도로 요란하지만, 정작 이보다 가슴을 뜨겁게 하는 장면은 청년 독립운동가들의 군무와 무대 위를 날아다니는 수천 마리의 나비다.

니체의 책이 해질 정도로 외운 박문자의 낭만과 23세에 감옥에서 스러진 그의 자유로운 영혼을 형상화한 나비 떼는 22년 2개월간의 감옥살이를 독립운동가로서 버틴 박열에 대한 경이로움이기도 하다. 진실이 아닌 것에 대해 항변하며 목숨을 건 박열의 결기는 그의 시 ‘나는 개새끼로소이다’에 곡을 붙인 넘버로 재해석됐다. 사형을 선고한 일본 재판관 앞에서 한복에 사모관대를 두르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친 20대 박열의 기개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창작 초연 뮤지컬 <제시의 일기>는 임시정부(이하 임정)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 부부 양우조, 최선화가 큰딸 제시를 출산하면서 쓰기 시작한 8년간의 육아일기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이들의 외손녀 김현주씨가 정리해 1999년 출간한 책 <제시의 일기>는 임정 요원들의 세세한 일상을 들여다볼 수 있는 귀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화자는 국권이 회복된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중년의 제시다. 1938년 7월 4일 중일전쟁의 포화 속에서 태어난 양제시는 부모의 육아일기를 읽으며 중국 전역을 떠돌았던 갓난아기 시절을 회상한다. 시간여행자처럼 부모 시대에 들어가 때론 어린 딸이 되고, 이웃이나 동료가 되기도 한다. 독립운동가로 살았던 부모를 다양한 관점에서 이해하고 체험하는 구조다.

1·2차 세계대전 속에서 미국과 중국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는 초보 아빠 양우조는 첫딸의 손가락, 발가락이 제대로 있는 것에 감격해 눈물을 흘린다. 출산 보름 만에 피란민 가득한 기차에 끼어 수유 중인 초보 엄마 최선화는 “내 딸이 사는 세상은 (임산부의) 몸조리도 가능하길” 기도한다. 임정 공동체에서 자란 제시에게 이동녕(신흥무관학교 초대 교장), 김구(임시정부 주석)는 사탕과 세뱃돈을 챙겨주는 가족이다. 제시는 이들의 희망이고 미래지만 부모 입장에서는 육아 난도 최고점의 애물단지다. 아빠의 긴 출장과 엄마의 입원에도 아이다움을 잊지 않는 제시의 난장판은 배우와 관객 모두 배꼽을 잡게 만든다.

소극장의 반원형 무대는 제시가 성장한 중국 동남부 지역의 비경을 수채화처럼 담아낸 요람이자 생생한 육아 현장이다. 관객들은 어느새 제시와 함께 부모 혹은 조부모 세대에 잠입해 각자의 기원을 돌아본다. 극중 엄마의 뱃속 존재로 언급된 제시의 동생 양제니씨는 뮤지컬 <제시의 일기>를 보고 “90년 전 새내기 부부와 오늘날 부부의 모습이 다르지 않아 신기했다. 오랜만에 내 가족 전부를 같은 공간에서 만나보게 된 기적 같은 시간이었다”고 소감을 전했다고 한다.

유쾌하고 낙천적인 딸바보 독립운동가 양우조와 최선화의 육아일기는 일본 패망과 광복을 맞이하는 순간 이들이 기쁨보다는 고통과 당혹스러움을 드러내면서 마무리된다. 조민영 연출은 “원작 일기장에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가슴이 뛰고 어지러워 자리에 가서 누워야 할 정도였다’라고 적혀 있다. 우리의 힘으로 이뤄낸 해방을 꿈꾸고 광복을 준비했는데 외세에 의해 바라던 모습으로 해방되지 않은 상황에 대한 고뇌가 담겨 있어 최대한 살렸다”라고 전했다. 국제 정세를 꿰뚫어 본 임정 요원 입장에서 광복이 또 다른 간섭과 내전으로 이어질 것임을 예감한 현실적인 반응이었던 셈이다.

<곤 투모로우>에서 고종에게 토로하는 독립운동가 한정훈의 피맺힌 절규가 귓전을 맴돈다. “조선이 조선으로 완전한 나라, 사람이 사람으로 당당한 나라, 그 나라가 이리도 갈 수 없는 나라입니까”라는 질문은 지금 이 시대에도 유효해 보인다. <곤 투모로우>는 10월 22일, <22년 2개월>은 11월 5일, <제시의 일기>는 10월 29일까지 상연한다.

<이주영 문화칼럼니스트·영상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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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전범의 아들 노다 마사아키가 쓴 <전쟁과 죄책>에는 포로의 목을 베라는 상관의 명령을 거부한 병사의 이야기가 나온다. 일본 관동군 중대장으로 근무했던 도미나가 쇼조의 증언에 따르면 중국 후베이성에서 포로를 베는 ‘담력’ 교육 도중 한 초년 병사가 “불교도로서 할 수 없습니다”라며 명령을 거부했다. 불교도로서 ‘살생하지 말라’는 계율을 지키려 했던 이 병사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홀로코스트 연구자 크리스토퍼 R. 브라우닝이 쓴 <아주 평범한 사람들>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학살 임무를 거부하고 총기를 반납한 나치 대원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독일 101예비경찰대대 빌헬름 프라프 대대장은 유대인 학살 임무에 투입되기 직전 병사들에게 “임무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면 앞으로 나오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10명 남짓 병사가 앞으로 나왔고, 그들은 소총을 반납하고 대기했다. 그 병사들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각 부대에서 학살 임무를 거부한 병사와 장교들이 속출했지만, 나치 독일의 가혹했던 군형법은 이들에게 명령불복종죄를 비롯한 어떠한 형사처벌이나 징계도 내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