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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김명수 대법원장 후임에 서울대 법대 1년 후배인 이균용 서울고법 부장판사를 후보자로 지명했습니다. 정통파 법관, 소신과 원칙, 재판과 이론 겸비, 엘리트 코스, 일본 법제 해박 등 다양한 배경 설명이 잇따릅니다. 김명수 원장 시절, 법원장으로 재직하면서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 제도 폐지 등 일련의 정책에 공개적으로 반기를 든 전력과 “최고 법원은 여론의 압력과 광기의 질주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 “재판의 권위와 신뢰를 세워야 한다”, “법관은 실제로 공정해야 하고, 또 공정하게 보여야 한다” 등 각종 매체 기고와 인터뷰, 국회 국정감사 등에서 한 과거 발언들도 소환됩니다. 특정 정파나 진영에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을 ‘사법 정상화’ 작업의 최종 책임자로 그를 지목한 듯보입니다.

[편집실에서]마지막 보루

말만 보고 누구를 제대로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실상은 뒤늦게 땅을 치는 사례가 비일비재한 게 세상사입니다. 갖은 기대를 안고 감투를 쓴 사람들이 막상 취임 후에는 엉뚱한 방향으로 달리거나 명성에 걸맞지 않은 행보를 보이는 경우도 무수히 많습니다. “사람에 따라 판결이 달라져서는 안 된다.” 지난해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 후보자가 했다는 발언 일부입니다. 10년 전 윤석열 대통령이 검사(여주지청장) 시절, 서울고등검찰청 국정감사장에서 일갈한 “저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습니다”가 떠올랐습니다. 이 ‘공개항명’ 발언으로 정파를 떠나 두루 깊은 인상을 남긴 그는 훗날 문재인 정권 출범 후 서울중앙지검장으로 파격 발탁됐고, 검찰총장을 거쳐 반대 정파의 후보로 출마해 대권까지 거머쥐었습니다.

청문회를 거쳐 대법원장에 오른다면 이균용은 어떤 길을 걸을까요. 그가 걸어온 길과 과거의 각종 소신 발언에 걸맞게 살아 있는 권력을 향해서도 흔들리지 않고 양심과 정의에 부합하는 판결을 내리는 ‘사법 독립’의 기수가 될까요, 아니면 ‘일관된 판결’이니 ‘예측 가능한 판결’이니 운운하며 정부·여당의 입맛에 맞는 판결만 내리면서 ‘사법 예속’을 가속화하는 방향으로 사법부를 이끌어갈까요. 대법원장이 바뀌었다고 전국의 각급 법원과 재판부의 판결이 당장 지금까지와 180도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도 안 됩니다.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습니다. 대법원 판례는 말할 것도 없고, 법관 평가 및 승진 제도 개편, 대법관 제청과 고위 법관 인사 등을 통해 법원 수뇌부의 의중이 판사 개개인의 판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맘만 먹으면 수도 없이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이균용 사법부에 대한 역사의 준엄한 평가는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극한대치의 시대입니다. 모든 갈등과 대립이 종국에는 법원을 향해 달려갑니다. 사법부가 정권의 들러리가 아니라 중심을 잡고 제대로 목소리를 낼 때 비로소 나라가 바로 설 수 있습니다.

<권재현 편집장 jaynew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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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 이후 준비해야 할 것들
오늘을 생각한다
탄핵 이후 준비해야 할 것들
밤새 뒤척인다. 겨우내 마음 편히 잠을 자지 못해 머리에 스모그가 낀 듯 무겁다. 창밖을 보니 눈이 내린다. 이상기온이 일상이 돼간다. 기후변화의 징후인 3월 중순 눈 쌓인 풍경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고 불길하다. 자연 시스템의 불안정성만큼이나 정치와 사법 시스템 또한 아슬아슬하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둘러싼 사회적 긴장은 한국 민주주의가 직면한 불안정성을 드러낸다. 일만 년간 이어온 기후 안정성과 40여 년이 채 안 된 한국의 민주주의는 기간으로는 비할 데 아니지만, 우리 삶에 당연히 주어지는 조건으로 여겨졌던 점은 흡사하다. 이번 겨울 기후환경이든 정치체제든,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것들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 여실히 드러났다. 기후위기와 정치위기라는 무관해 보이는 두 위기는 사실 그 원인 면에서도 맞닿아 있는데, 효율과 성과가 최우선시되는 과정에서 다른 중요한 가치는 간과했다는 점이다. 한국사회는 산업화하는 과정에서 빠르게 성장하는 법을 배웠지만, 화석 연료 중심의 에너지 구조를 전환하는 데 게을렀고, 정치적 다양성과 세대 간의 이해를 구현하지 못했다. 우리는 경쟁을 통해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지만, 이제는 그러한 방식의 성장이 우리 사회를 갉아먹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