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신림역·서현역의 흉기 난동 사건과 신림동 성폭행 살인사건 등 소위 ‘묻지마 범죄’가 사회를 뒤숭숭하게 만들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흉악 범죄는 늘 있었지만, 최근의 범죄 양상은 분명 과거와 구별되는 특성이 있다.
우리 사회의 흉기 난동 사건은 대개 조직 폭력배들의 영역 싸움에서나 등장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 사건들은 조직 폭력과는 무관한 ‘개인적 일탈’이고, 그 대상이 ‘딱히 특정되지 않는 일반 대중’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범죄로부터의 이익이 불분명한 것이다. 범죄 혐의자들이 체포와 처벌을 각오한 듯한 모양새를 보이는 점도 특이하다. 그래서 이를 일반적인 ‘흉악 범죄’로 규정하기에는 부적절한 측면이 있다.
정부는 ‘가석방 없는 무기형’ 도입 등 폭력 범죄에 대한 처벌 강화를 대책으로 발표했다. 하지만 사후적인 처벌 강화가 본질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묻지마 범죄를 유발할 수 있는 근본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 승자독식만을 가르치는 비뚤어진 교육 관행을 바로잡고, 생명의 존엄성을 고취하고, 영유아나 여성 등 약자에 대한 폭력의 저열함도 강조해야 한다. 정신질환자에 대한 적극적이고 선제적인 치료와 사회적 관심도 필요하다.
극단적 범조 이면의 물질적 결핍
편협한 가치관과 생명경시 그리고 소외 문제의 이면에 절대적·상대적 빈곤이라는 물질적 결핍 문제가 자리하고 있음도 잊어서는 안 된다. 물질적 결핍은 극단적 범죄의 형태로 표출되건 그렇지 않건 사회의 건강함과 지속성을 좀먹는 마약이다. 오늘은 이 부분을 살펴보자(이하의 논의는 자칫 곡해의 소지가 있다. 곡해를 방지하기 위해 나는 절대로 폭력을 미화하거나 정당화하지 않는다는 점과 사람의 생명과 행복은 누구를 가릴 것 없이 소중하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어떤 사회에 금수저와 흙수저가 살고 있다고 하자(어떤 개인이 금수저 또는 흙수저가 된 경위는 순전히 우연에 따른 것이라고 하자). 금수저는 자신의 재산으로 풍족한 생활을 누릴 수 있는 반면, 흙수저는 자기가 가진 것만 가지고는 입에 풀칠하기도 어렵다.
첫 번째 질문은 “과연 이들은 어떤 삶의 방식을 선택할까?”다. 재산이 많은 금수저는 아마도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그럼 흙수저는?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상태에서 아무런 희망 없는 삶을 힘겹게 이어갈 것인가? 아니면 다른 대안을 찾을까?
(도덕이나 윤리의 문제를 잠시 제쳐 놓을 때) 흙수저가 모색할 법한 대안 중 하나는 ‘이 한 많은 세상을 스스로 떠나는 것’이다. 자살. 다른 하나는 ‘이 더러운 세상에 극단적 방법으로 항의하는 것’이다. 폭력. 형태는 다르지만 모두 ‘사회적 살인’이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잠시 리투아니아에 1위를 내준 적도 있지만) 2003년 이후 약 20년간 굳건히 OECD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특히 노년층의 자살률이 심각하다. 그렇다면 폭력은? 지금 우리가 그 증가세를 목도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이제 더 이상 ‘밤길이 안전한 나라’가 아니다. 사회가 병들어 있다는 증거다.
두 번째 질문은 “그럼 우리 사회에서 누가 금수저이고 누가 흙수저인가?”다. 이에 대한 대답이 조금 어렵다. 언뜻 생각하면 금수저는 열심히 노력한 결과 큰 재산을 모은 개미를 말하고, 흙수저는 땀 흘리고 힘든 일은 외면하고 그냥 편하게 살려는 베짱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불편한 진실은 모든 금수저가 열심히 일한 개미가 아니고, 모든 흙수저가 뺀질뺀질한 베짱이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흙수저들의 옷이 아마도 더 땀에 절어 있을 것이다.
개인적 노력의 차이에 기인하는 빈부 격차를 논외로 할 경우, 빈부 격차의 문제는 사회적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여러 사회 계층이 빈곤의 문제에 시달리고 있지만, 묻지마 범죄의 배경과 관련해서는 특히 세대 간 경제적 불평등 문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의 청년 세대는 지금 매우 독특한 상황에 직면해 있다. 이들은 우리나라가 경제개발을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지 못한 세대다. 청년 세대의 상당수는 비정규직과 최저임금을 일상으로 겪고 있고, 바벨탑보다 높아 보이는 집값을 보면서 월세를 걱정하고 있다. 이들은 노년층에 대한 부양 부담의 악몽도 견뎌내야 한다. 그 결과는 실질 소득의 감소다.
실질 소득 감소는 어떤 결과를 초래할까? 맬서스의 <인구론>에 등장하는 적극적 견제에 따르면 실질 소득의 감소는 기아, 질병, 전쟁 등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과정을 통해 인구의 감소를 가져온다. 즉 누가 죽어야 문제가 해결된다는 뜻이다. 그럼 누가 죽는 대상이 될까? 아마도 약자인 빈곤 노년층일 것이다. 노년층 자살률이 OECD 1위라는 점은 이미 변형된 형태로 적극적 견제가 작동 중임을 시사한다.
맬서스가 말한 ‘예방적 견제’
맬서스의 <인구론>에는 예방적 견제도 있다. 높은 소비수준을 맛본 사람들이 그 소비수준의 하락을 방지하기 위해 스스로 인구 증가를 줄여나간다는 것이다. 그럼 누가 이런 선택을 할까? 결혼과 출산을 통제할 수 있는 청년층이다. 우리나라의 합계출산율이 OECD 국가 중 꼴찌라는 점은 예방적 견제도 작동 중이라는 뜻이다.
맬서스의 경제학은 언제나 우울하다. 더 우울한 것은 그 어떤 견제도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적극적 견제로 폭력이나 빈곤 노년층의 자살을 방치할 수도 없고, 예방적 견제에서 비롯된 결혼과 출산 포기를 환영할 수도 없다.
세 번째 질문은 “그럼 어찌해야 하는가?”다. 금수저와 흙수저의 재산을 재배분하는 사회계약이 필요하다. 금수저의 재산을 조금 떼어 와서 흙수저의 재산에 더해 주는 것이다. 특히 부유한 노년층의 경제적 부를 청년 세대로 일부 이전하는 세대 간 사회계약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이런 사회계약은 실현불가능할 것이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노년층이 일방적으로 밑지는 장사라서 이런 계약에 동의할 이유가 없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계약은 그러나 궁극적으로 노년층에게도 이익이 된다. 청년층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면 노년층에 대한 청년층의 부양 가능성이 커질 뿐만 아니라 이런 계약이 없을 때 만연하게 될 적극적 견제를 예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목도하고 있는 자살, 영유아 학대, 결혼 및 출산 포기, 묻지마 범죄 등은 모두 우리 사회에 세대 간 사회계약이 존재하지 않아서 그보다 훨씬 더 엄혹한 맬서스식의 견제가 작동 중임을 보여주는 증거다. 진정한 정치 지도자라면 모든 세대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새로운 계약을 맺도록 노년층을 어떻게 합리적으로 설득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그것이 문제 해결의 시작이다.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