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이 끝나면 관객들이 참여하는 ‘더 센’ 공연이 시작된다. 잠깐의 암전 후 조명이 객석으로 향하면 약속이나 한 듯 모두 기립해 함성을 지른다. 이제 배우들은 잠시 숨을 돌리고 관객들의 ‘싱어롱’을 관람할 차례. 천천히 추임새를 놓거나 객석으로 뛰어들어 마이크를 관객에게 건네며 ‘싱어롱’에 동참한다. 여름휴가 시즌 대학로를 들뜨게 하는 관객 참여형 록뮤지컬 현장이다.
모든 공연이 사실상 싱어롱 데이
분명 뮤지컬 공연장인데 로비에는 야광봉과 야광팔찌를 들고, 티셔츠를 맞춰 입은 관객들이 가득하다. 간혹 록스타 코스프레를 한 관객도 보인다. 대다수 뮤지컬은 싱어롱 데이 등 특정 날을 정해 관객참여를 이끌지만 록뮤지컬은 예외다. 모든 공연이 사실상 싱어롱 데이. 관객 반응에 따라 같은 작품도 매회 다른 공연이 된다. 마니아들에게는 관객이 적극 참여할 수 있는 앙코르 공연이 본공연이므로 제대로 즐기려면 복색(단체 티셔츠)과 장비(야광봉과 야광팔찌)를 갖추는 일은 필수다.
창작 뮤지컬 <트레드밀>은 초고가 차를 세차하는 ‘워싱 존(Washing Zone)’이 배경이다. 브루클린 화재사건의 유일한 생존자 A는 부모와 행복하게 지냈던 장소에 생긴 세차장에서 갑질하는 부호들을 상대하며 부모가 남긴 빚을 갚는다. 제목인 ‘트레드밀’처럼 끊임없이 반복되는 ‘을 중의 을’인 삶이다. 그를 바꾸려는 존재가 등장한다. 고객의 차에 스크래치를 내 고민하던 A에게 “세상은 원래 부조리 그 자체”라며 B는 아예 차를 때려 부순다. A와 정반대의 삶을 주장하는 B는 폭력적인 세상에 폭력으로 맞선다. 늘 “죄송합니다”를 외치는 A와 달리 B는 “받는 대로 돌려줘야 한다”고 외친다. 둘의 간극은 3인조 록밴드의 라이브 연주와 ‘로커’의 화려한 발성으로 메꿔진다.
대학로 록뮤지컬의 중흥기를 이끈 <트레이스 유> 역시 본격적인 록콘서트 현장을 방불케 한다. 록클럽 드바이의 보컬 본하는 오랫동안 흠모해온 여성이 보이지 않자 슬럼프에 빠진다. 클럽 운영자이면서 보컬이었던 우빈은 “노래에 집중해야 여자도 찾아온다”며 본하를 설득해보지만, 다툼만 늘어간다. 이들의 갈등과 본하의 그리움이 하드록과 5인조 라이브 록밴드의 연주를 통해 점점 더 미스터리한 사건으로 확장된다. 무대 중앙 스크린과 양쪽 액정 기둥에 영사되는 본하와 우빈의 속내와 사연은 온몸의 세포를 깨우는 하드록과 애잔한 발라드를 반복하며 관객 반응을 견인한다. 하드록과 밴드 연주를 전면에 배치한 작품이어서 매회 공연하는 배우들의 해석에 따라 서사도 조금씩 달라지며 정형성을 탈피한다.
올해 초연인 록뮤지컬 <백작>은 밤에만 전투에 임하는 군신(軍神) 백작과 포로 V가 대치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성주(城主)인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배다른 동생을 대신해 포로가 된 사생아 V는 사실상 버려진 존재다. 영생의 삶을 사는 백작은 과거 인간이었던 시절 자신을 위해 희생한 뱀파이어 용병을 기억하며 소외된 V에게 영생을 선사한다. 록뮤지컬을 표방하고 록사운드가 작품의 반 이상을 지배하지만 알고 보면 뮤지컬 <백작>은 애잔한 사랑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이다. 여러 인물을 연기하며 무관심과 고독에 찌든, 소외된 존재에 대한 측은지심을 잘 표현해낸 2명의 배우가 후반부의 극적 전환을 이끄는 동시에 관객들의 몰입을 이끈다.
나를 찾아 나를 자유롭게 하자는 록뮤지컬의 지향점은 적극적인 관객참여로 완성된다. <트레드밀>이 관객과 상호작용하는 장치는 객석 한가운데에 마련된 통로. 배우들의 진출입로이자 극의 일부가 진행되는 이곳에서 관객들은 사진 찍어주는 친구, 갑질하는 부호, 거리의 행인 등으로 자연스레 스며든다. <트레이스 유>는 무대 위 안쪽에 객석을 마련해 관객을 또 다른 등장인물로 참여시킨다. 관객몰입형 이머시브(Immersive) 공연의 변주다. 처음부터 관객과 함께 극을 이끌어가는 적극적인 이머시브 연극과 달리 객석 가운데, 혹은 무대 위에 또 다른 무대를 설치해 관객이 자신도 모르게 극에 참여하도록 기획했다.
<트레드밀>에서 베이스 기타리스트로 참여하는 박영신 음악감독은 “관객들이 기대 이상의 호응을 보여준다. 공연이 끝난 뒤에 밴드는 모든 관객이 퇴장할 때까지 록앤드롤 스타일의 잼(즉흥) 연주를 하는데, 끝까지 자리에 남아 있는 관객이 많아 어쩔 수 없이 연주를 마쳐야 했다”며 현장의 열띤 분위기를 전했다. 또한 “밴드가 배우들의 동작과 대사에 맞춰 연주하는 ‘언더스코어(극의 흐름을 돕는 배경음악)’는 배우들과 페어의 호흡이 달라 매회 바뀌는 출연진들의 해석에 몰입해 그에 맞게 맞춰 연주하고 있다”라며 록뮤지컬의 모든 요소가 일체화되는 과정도 설명했다.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석방하자!
‘내 안에 숨어 있는 나를 찾아 존재를 인정하고 간극을 메워보자’. 세 작품이 전하려는 공통적인 메시지다. <트레드밀>의 A와 B, <트레이스 유>의 본하와 우빈은 한 사람의 다양한 인격이다. <백작>의 백작과 V는 과거의 나를 현재에서 다시 마주했다는 동질감으로 엮인다. 분열된 자아와 후회하는 과거의 나에게 ‘록 스피릿(Rock Spirit)’을 강조한다. 순응하고 맞춰나가는 것, 내 안의 나를 죽이는 것이 진리는 아니라는 깨달음을 준다. 차라리 나를 죽일지언정 박차고 나가 체제에 저항하라는 주장이다. <트레드밀>의 주요 넘버 ‘트레드밀’은 “지겹게 반복되는 권태로운 나의 인생, 아무리 발버둥 쳐봐도 변하지 않는 내일이면 방아쇠를 당겨 힘차게, 빌어먹을 세상을 향해”라고 외친다. <백작>의 주요 넘버인 ‘나는 나를 석방한다’ 역시 “나는 나를 용서한다, 나는 나를 해방한다, 나는 나를 석방한다”를 반복한다.
록뮤지컬을 볼 때마다 최근 잇따라 일어난 청년세대의 비극적인 사건이 자꾸 떠올랐다. 그들이 이 작품을 접했다면 보다 자신에게 영리한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트레드밀>은 모든 공연이 쉬는 월요일에도 공연한다. 직장인들의 ‘월요병’ 퇴치를 돕기 위해서다. 마침 월요일 밤 공연을 보았다. 젊은 직장인들의 지붕을 뚫을 듯한 함성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들이 마음껏 소리 지를 장소가 있다니 그 얼마나 다행인가. <트레드밀>은 9월 17일, <트레이스 유>는 8월 20일, <백작>은 8월 27일까지 공연한다.
<이주영 문화칼럼니스트·영상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