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링컨 미 국무장관이 중국으로 날아가 시진핑 국가주석을 만났습니다. 다음날 도하 각 신문에 커다랗게 실린 면담 사진이 꽤 충격적입니다. 한가운데 상석에 회의를 주재하듯 시 주석이 앉아 있고, 양옆으로 블링컨 미국 대표부 일행과 왕이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을 비롯한 외교·안보 라인들이 줄지어 마주보고 앉아 있습니다. 시 주석 뒤로, 커다란 그림이 사진의 배경을 장식하고 있고, 널찍한 테이블은 머나먼 미국과 중국의 거리, 같은 자리에 앉아 있어도 딴생각을 하는 동상이몽의 현주소를 여실히 보여주는 듯합니다.
블링컨은 세계 초강대국 미국 바이든 대통령을 대신해 베이징에 발을 들였습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사람들이 판사 개인의 판결문에 승복하고, 의사 개인의 진료를 믿고, 기자 개인의 물음에 답하는 건 왜일까요. 그 뒤에 법원이라는 사법시스템과 병원이라는 의료시스템이 있고, 국민의 알권리 충족이라는 대명제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블링컨도 마찬가지입니다. 일개 국무장관이 아니라 적어도 그 자리에서만큼은 미국을 대표하는, 바꿔 말하면 미국이라는 세계 패권국가 바로 그 자체를 상징하는 인물이라는 거지요.
미국이 먼저 손을 내밀었습니다. ‘치킨게임’처럼 마주보고 달리다 먼저 열차에서 뛰어내린 것도 모양 빠지는데, 미국의 ‘특사’가 초라한 모양새로 대국의 ‘황제’를 알현하고 있습니다. 면담의 실체가 어쨌든, 어떻게 성사됐든, 뭔 얘기를 주고받았든, 적어도 사진으로만 보면 그렇습니다. 무릇 의전이란 게 상대방의 마음을 흔들어 최대의 이익을 끌어내고자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예술행위라고 할 때, 이번 심리전의 승자는 누가 봐도 중국입니다. 감히 ‘미국’을 부하와 동급에 앉힌 시진핑의 선택과 전략에서 세계는 중국의 자신감을 읽습니다. 만방에 그 위상을 여지없이 펼쳐내보였다는 점에서 중국으로선 기가 막힌 사진을 연출해 찍은 셈입니다.
그러면서도 수위를 조절합니다. 패권에 도전하지는 않겠답니다. 할 말은 또 합니다. 존중해 달랍니다. 중국이 오래전부터 강조해온, 신형대국관계의 재천명입니다.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겠다는 거죠. 달리 말하면 천하를 나눠 갖겠다는 거고요. 넓은 지구는 중국과 미국이 각자 발전하고 함께 번영하기에 충분하다나요. 구밀복검(口蜜腹劍)이라고, 웃으며 내뱉는 말 속에 가시가 돋쳐 있습니다. 점잖게 ‘공존’ 운운하지만, 이는 곧 여차하면 ‘지존’을 넘어서겠다는, 발칙한 상상의 발현입니다. 하늘에 태양이 두 개일 수는 없으니까요. 과거 냉전 시기, 미국과 소련이 괜히 그토록 치열하게 맞붙었겠습니까. 미·중 양국의 대화를 하나하나 뜯어보니 어마어마한 긴장과 갈등, 노림수가 행간 곳곳에 숨어 있습니다. 칼만 안 들었을 뿐, 전쟁이 따로 없습니다. 정신 바짝 차려야겠습니다.
<권재현 편집장 jaynew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