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하수도가 터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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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유난히 터지는 게 많은 여름이었다. 잘하던 연애가 터지고 일 때문에 복장이 터졌다. 엄마와 싸우느라고 박이 터졌다. 그러다가 하수도까지 터졌다. 아주 사이좋게 다 터지는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빌라 반장님이 말했다. 그 집에서 설거지 한 번만 해도 지하 집에 물웅덩이가 생겨요. 나는 마포구에 있는 지은 지 33년 된 빨간 벽돌의 빌라에 살고 있었다. 그 정도면 뭐가 터져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하수도관은 땅속 깊숙이 파묻혀 있었고, 한 번도 빛을 본 적이 없었다. 포클레인을 불러 대대적인 공사를 해야 한다고 했다. 보름 동안 물을 못 쓰게 될 거랬다. 놀란 마음을 추스르며 손을 씻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다. “방금 물 썼죠? 지하에 물 내려오네요.” 나는 말했다. “아….”

공사가 시작됐고, 물이 없는 생활은 곡예에 가까웠다. 수도에서 물이 나오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지만, 그것을 하수도로 흘려보내는 것은 문제가 됐다. 물을 버릴 수 있는 통로는 변기가 유일했다. 나는 화장실 세면대에 세숫대야를 두고 세수를 한 뒤에 물을 변기에 내렸다. 부엌 싱크대에 세숫대야를 두고 설거지를 한 뒤에 변기에 내렸다. 샤워를 할 때는 바닥에 세숫대야를 두고 그 안에 들어가서 몸에 물을 끼얹고 변기에 내렸다. 설거지를 할 때는 8번, 샤워를 할 때는 20번씩 변기를 왕복했다. 오줌과 똥을 쌀 때도 물론 변기에 내렸다. 입으로 밥도 먹고 똥도 싸는 기분이었다. 물 길으러 가는 아이처럼 커다란 대야를 지고 집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세상과 나를 잇는 것이 변기밖에 없는 것 같았다.

하나 좋은 점이 있었으니, 친구들이 밥을 사줬다. 집주인에게 하다못해 소정의 목욕탕비라도 청구해볼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친구의 말에 패기롭게 전화를 걸었다가 집주인과 한바탕 싸움을 벌였다. 계약서 대필 비용 5만원을 아끼겠다고 집까지 직접 찾아왔던 구두쇠 주인이었다.

한껏 떡진 머리로 목욕탕으로 향하는데 반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하수도 공사비 세입자 측에서 내라는데요.” 2주간의 곡예가 끝나가는 기쁨도 잠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알아보니 나를 제외한 다른 층의 세입자들은 모두 집주인이 공사비를 지불한 상태였다. 오직 내 집주인만이 하수도 폭파의 원인이 세입자에게 있다고 말하며 일금 150만원의 공사비 전부를 나에게 청구했다는 것이다. 이 집과 막 2년 정도 관계를 맺은 내가 33년의 세월을 겪었을 하수도에 끼쳤을 영향은 잘 쳐도 10%도 되지 않을 거였다. 논리도 근거도 없는 보복성 청구였다. 목욕탕 비 한번 받아보려고 했다가 10년치 목욕탕 비를 날리게 생긴 상황이었다.

하수도 공사 담당자의 연락처를 물어 진위를 확인해보았다. “그 하수도 30년이 넘었는데 당연히 노쇠해서 터진 거죠.” 그는 분명 그렇게 말했으나 내가 사정을 설명하고 증거 자료 녹취를 위해 한 번 더 말해달라고 말하자 태도가 돌변했다. 전화가 안 들리는 듯 갑자기 여보세요, 여보세요 몇 번을 하더니 그대로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집을 소개해준 중개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뭘 그렇게 갑갑하게 구신데요….” 150만원이라는 거금을 내라는 게 그저 ‘갑갑하게 구는 것’이라니 그야말로 갑갑한 일이었다. 국가법률상담센터에도 전화를 걸었다. 10번을 넘게 걸어도 같은 답만 돌아왔다. ‘문의가 폭주하니 다음에 다시 전화해주시기 바랍니다.’ 억울한 사람들이 모두 전화통을 붙들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떤 소득도 없이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그까짓 150만원 그냥 줘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편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더 많은 시간과 힘을 소진하느니, 그 돈을 줘 버리고 그 시간에 돈을 버는 편이 경제적일 것 같았다. 친구들은 말했다. “그냥 150만원짜리 똥 밟았다 생각해.” 바람 앞에 촛불이 된 기분이었다. 갑이 이렇게 안 내겠다고 버티면, 이렇게 넋 놓고 당할 수밖에 없는 게 을이라는 것인가. 집주인의 근거 없는 한마디로도 맥없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 나의 현주소인가. 문제는 싸운다 해도 어떤 방법이 있을지 떠오르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닥치면 무얼 할 수 있는지 어디에 물어야 하는지 배운 적이 없었다. 조언을 구해볼 어른이 단 한명도 떠오르지 않았다.

절박한 마음으로 여기저기 하소연을 하던 와중에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대부분이 그냥 돈을 지불하고 상황을 마무리했다는 것도. 그러던 중 임대차 분쟁 조정위원회를 알게 됐다. 대한법률구조공단에서 운영하는 기관으로, 법적 강제력은 없지만, 중재자로서 조정안을 제시하고 협력을 유도해주는 기관이었다. 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들어본 적도 없는 곳이었다. 나는 곧바로 조정신청을 넣었다. 간단하게 상황을 설명하는 글을 작성하고, 계약서와 신분증, 등기부 등본과 1만원의 신청비를 제출하면 됐다. 뒤이어 민달팽이 유니온에도 전화를 걸었다. 세입자들의 권익과 청년의 주거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하는 단체로 진즉부터 알고 있던 곳이었는데, 막상 상황이 닥치니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민달팽이 유니온의 상담사는 몇 마디 만에 내 상황을 완벽히 파악했고, 나에게 필요한 정보와 취할 수 있는 조치들을 체계적으로 설명해주었다. 5분 만에 내 상황은 아주 간단해졌다. 그것은 전혀 독특한 케이스가 아니었다. 전형적인 주거 문제였다.

임차인이 그 수선 의무를 부담하게 되는 것은 통상 생길 수 있는 파손의 수선 등 소규모의 수선에 한한다 할 것이고, 대파손의 수리, 건물의 주요 구성 부분에 대한 대수선, 기본적 설비 부분의 교체 등과 같은 대규모의 수선은 이에 포함되지 아니하고 임대인이 그 수선 의무를 부담하여야 한다(대법원 94다34708 판결).

무려 대법원이 내 권리를 법적으로 보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판례는 수도 없이 많다”고 상담사는 말했다. 처음으로 웃음이란 것이 터졌다. 나는 이 판례를 그대로 복사해 집주인에게 보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이러한 판례는 수도 없이 많다’고. 한 달 뒤 조정위원회의 소견서가 집주인과 나에게 사이좋게 배달됐다. 자문위원 6명 전원이 모두 나의 손을 들어주고 있었다. 도장 몇 개가 찍힌 그 하얀 종이가 얼마나 반짝였는지 모른다. 물론 가장 좋은 일은 하수도가 터지지 않는 거다. 세상의 어떤 하수도도 터지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하지만 터질 것은 터져버린다. 그렇더라도 인생의 모든 순간은 150만원보다 값지다. 나는 생각한다. 어디선가 누군가의 하수도가 터진다면, 그 전화를 받을 사람이 되고 싶다고.

<양다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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