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엘리멘탈(Elemental)
제작연도 2023
제작국 미국
상영시간 109분
장르 애니메이션
감독 피터 손
목소리 출연 레아 루이스, 마무두 아티 외
개봉 2023년 6월 14일
등급 전체 관람가
제작 디즈니·픽사
수입/배급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4개의 원소라. 물, 불, 흙 그리고 또 하나는 뭐지? 극장에 들어가면서 생각했다. 공기 또는 바람일 것이다. 원소(element)의 의인화라. 재미있는 착상이다. 동양의 오행설까지 가지 않더라도 물과 불은 상극이다. 근본적으로 섞이기 힘든 원소들이 어우러져 사는 대도시. 이름하여 엘리멘트 시티다. 이 도시의 대중교통수단은 수로를 통해 움직이는 전철이다. 전철이 지날 때마다 물이 거리로 쏟아진다. 불족(火族-편의상 이렇게 부르자)이 길을 걷다 물을 맞으면 날벼락이다.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다. 영화상에서 불 계통의 주민들은 이런 불상사를 피하기 위해 기력을 보충하는 땔감을 에너지바처럼 들고 다닌다. 일단 쏟아지는 물을 막기 위한 우산은 필수.
원소의 의인화라는 착상
영화의 주인공은 ‘파이어랜드’에서 이민 온 루멘씨네 가족의 딸인 엠버다. 영화는 바다 건너 대도시 ‘엘리멘트 시티’에 루멘씨네 가족이 배를 타고 와 내리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이 도시는 각 원소족(族)으로부터 끊임없이 새로운 이민자들을 빨아들인다. 정착은 쉽지 않았다. 불족이라 아무래도 일반 건물에서 거주하게 되면 화재 위험성이 있다. 어느 빈 건물을 무단 점거한 아버지 버니 루멘은 그곳을 터전으로 삶을 일구었다. 거기서 외동딸 엠버가 태어난다. 시일이 흐른 뒤 성장한 엠버. 아버지는 딸에게 자신의 가게를 물려 주고 싶어한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가게를 이어받고 싶어했던 엠버에게 어느 날 사건이 벌어진다. 지하실 파이프가 누수된 것이다. 불족에겐 큰 위험이다. 시청조사원인 웨이드는 루멘씨네 가게가 허가받지 않은 건물이라며 폐업조치를 통보하려 한다. “가게는 평생 일궈온 아버지의 꿈이었다”고 선처를 부탁하지만 이미 늦었다. 티격태격하는 웨이드와 엠버. 누수의 원인을 찾다 보니 수로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발견한다. 이를 바로잡지 않으면 도시에 엄청난 재앙이 벌어질 거라는 걸 알게 된다.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같이 뛰다가 둘은 사랑에 빠진다. 물과 불의 사랑이라. 사랑이라는 것이 마음만 나누는 ‘플라토닉 러브’가 아니라면 현실적으로 신체적인 접촉, 교류도 있어야 하는데? 이들의 사랑은 결국 어떻게 될까.
일단 믿고 보는 디즈니 픽사 영화다. 픽사가 만들었다면 기본은 한다. 스토리 구축이나 연출 완성도에서는 첫 장편영화 <토이 스토리>(1995) 때부터 정상급이 아니라는 의심을 받은 적이 없다. 각기 성격이 다른 4개의 원소가 인종에 대한 메타포라는 점을 누구나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런데 인종이라는 게 물과 불처럼 정말 섞이기 어려운 걸까. 연출을 맡은 한국계 감독 피터 손에 따르면 이 이야기는 자전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그 자신은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는 한국에서 이민 왔다. 뉴욕 브롱크스에 정착한 부모는 채소가게를 열어 말하자면 자수성가했다. 앞서 물과 불이 섞일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제시했는데 실제 교포사회는 생각 이상으로 보수적이다. 아무리 미국에서 나고 자랐더라도 결혼은 한국 사람하고 해야 하며, 지역사회 커뮤니티도 주로 한인교회를 통해서만 형성된다(스티브 연 주연의 넷플릭스 시리즈 <성난 사람들>(beef·2023)을 보라).
4원소설에 빗댄 인종적 다양성 메타포
하지만 이 영화는 다양성(diversity)을 최상위 가치로 내세우는 할리우드 영화라는 점을 잊으면 안 된다. 엠버와 웨이드의 사랑은 연애 상담을 하는 역술인을 업으로 하는 엠버의 엄마와 토마 피케티식으로 말하면 ‘브라만 좌파’쯤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웨이드 가족의 지지를 먼저 받는다. 완고한 아버지 버니 루멘도 ‘대(大)사건’을 경험하고 마침내 돌아선다. 아쉬운 건 4원소 중 물과 불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다 보니 나머지 두 원소-흙과 공기-여기는 구름으로 형상화했다-의 에피소드가 너무 주변부로 밀려났다는 점이다. 왠지 ‘다양성이 결국은 옳다’는 최신 할리우드 가치관 내지는 이데올로기 전파의 선봉장이 돼왔던 픽사답지 못한 연출이다. 기본 세계관이 설정됐으니 얼마든지 후속편 내지는 스핀오프를 만드는 것이 가능할 듯싶다. 하지만 <토이 스토리>나 <더 카> 시리즈에서 보듯 픽사는 후속편에 인색하기로 유명하다. 2030년쯤 되면 <엘리멘탈 2>가 나올까. 글쎄다.
뤽 베송은 <제5원소>(1997) 영화를 통해 위의 물·불·흙·공기의 4원소에 더해 또 하나의 원소가 있다고 주장했다. 바로 사랑이다. 모두가 행복해지지 않는 결말이라면 ‘어른과 아이들이 모두 즐길 수 있는’ 가족영화를 만들어온 픽사의 방침과 다르다. 결국 엠버와 웨이드의 사랑은 이뤄진다는 설정인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물과 불의 사랑으로 자식을 낳는다면 그 자녀는 어떻게 될까. 예전에 한 연재 코너에서 일본 애니메이션 <이웃집 토토로>(1988)와 관련된 괴담을 검증한 적이 있다. ‘알고 보니’ 주인공 사츠키의 여동생 메이는 물에 빠져 익사했고, 동생의 죽음을 슬퍼한 나머지 사츠키는 숲에 사는 도깨비 토토로에게 여동생에게 데려가 달라고 부탁한다. 부탁받은 토토로와 고양이버스가 데리고 간 곳은 삼도천 너머 저승?이미 메이는 현생에 있지 않으므로?이고, 어머니 병문안을 간다는 등의 설정은 사츠키가 죽어가며 목격하는 주마등이라는 해석이다(사진). 그런데 이 섬찟한 해석은 영화의 엔딩크레딧에 삽화처럼 붙어 있는 후일담 덕분에 무너진다. 폐병을 앓던 어머니는 퇴원해 사츠키 자매의 환영을 받았고, 토토로와 어울려 가을에 감을 따먹는 등 소소하지만 행복한 일화로 가득 찬 평온한 일상을 보낸다는 설정이다. 다시 <엘리멘탈>로 넘어오자. 자신의 재능에 눈을 떠 대륙 건너편 큰 회사에 인턴으로 들어간 엠버와 세계여행에 나선 웨이드 커플은 그후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았을까. 엔딩크레딧에서 토토로와 같은 후일담을 기대했지만, 엔딩크레딧에 아기자기하게 등장한 것은 불을 모티브로 한 다양한 상품의 그림이었다. 아이디어 자체는 딱 픽사답게 영민하게 빛났지만 뭔가 아쉬움이 남았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