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부 타도 향해 한 발 ‘전진’한 태국 국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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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14일(현지시간) 치른 태국 총선에서 유권자들은 변화에 확실한 힘을 실어줬다. 이번 총선은 2014년 쿠데타 이후 두 번째이자 2020년 대규모 민주화 시위 이후 첫 번째 치러진 총선이었다. 태국 국민의 정치적 열망이 터져나오는 무대가 됐다. 군부를 확실히 몰아내려면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이 아직 많다. 변화는 이제 막 시작됐다.

피타 림짜른랏 태국 전진당(MFP) 대표가 지난 5월 15일(현지시간) 방콕 당 본부에서 열린 기자회견 중 손을 흔들고 있다. / 로이터연합뉴스

피타 림짜른랏 태국 전진당(MFP) 대표가 지난 5월 15일(현지시간) 방콕 당 본부에서 열린 기자회견 중 손을 흔들고 있다. / 로이터연합뉴스

젊은 진보 정당, ‘탁신 대 군부’ 구도를 깨다

뚜껑을 열어보니 변화의 목소리는 예상보다 더 거셌다. 총선 결과, 사회민주주의·진보 성향의 전진당(MFP·까우끌라이당)이 하원 152석을 가져가며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막내딸 패통탄 친나왓(37)이 이끄는 프아타이당(141석)을 앞질렀다. 전진당은 특히 수도 방콕의 지역구 의석 33개 중 32개를 싹쓸이하는 등 도시 지역에서 강세를 보였다.

전진당은 군주정 비판, 군부 타도 등을 외치며 2020년 거리로 쏟아져 나온 태국 청년들의 정치적 동력을 흡수한 젊은 정당이다. 2019년 의회에 입성한 퓨처포워드당이 전진당의 전신이다. 퓨처포워드당은 2020년 자금 조달 규정을 위반했다는 구실로 해산됐으나, 이는 그 해 열린 대규모 반정부 집회 ‘세 손가락 시위’의 도화선이 됐다. 피타 림짜른랏 대표(43)는 퓨처포워드당을 전진당으로 재탄생시켰다. 이번 총선에서 젊은 세대를 적극 공략해 승리를 견인했다.

선거 전까지 대부분의 여론조사가 프아타이당의 승리를 예상했다. 무엇보다 탁신 가문이 하나의 ‘정치 왕조’로서 태국 정계를 지난 20여년간 주름잡아온 만큼 ‘탁신 딸’의 패배를 내다본 이는 많지 않았다. 패통탄을 총리 후보이자 ‘당의 얼굴’로 전면에 내세운 프아타이당은 현금 살포 성격이 짙은 포퓰리즘 공약을 펼쳤지만, 결국 전진당에 제1당 자리를 내주게 됐다.

이는 태국 정치에서 오래도록 굳어진 ‘탁신 대 군부’라는 구도가 깨졌음을 의미한다. 그 틈새를 젊은 진보 정당이 파고든 지각변동이다. 탁신계 정당은 2001년 이후 선거에서 모두 제1당의 지위를 차지했다. 반면 전진당은 2019년 12월에야 현재의 이름을 얻었다. 내세운 공약 또한 징병제 폐지·군주제 개혁·동성결혼 허용 등 진보적이다.

누구도 예상 못 한 전진당의 승리는 곧 태국의 정치적 세대교체를 뜻하기도 한다. 탐마삿 대학의 쁘라짝 껑끼라띠 교수는 태국 주류 정치에서 진보적인 의제를 확고히 확립한 전진당의 출현은 “돌이킬 수 없는 전환점이며 이제 누구도 그들을 제거할 수 없다”면서 “전진당은 진정한 변화를 필요로 하는 태국의 새로운 세대, 새로운 유형의 유권자를 대표하는 정당”이라고 최근 ABC방송에 말했다. 티띠난 뽕수티락 쭐랄롱꼰대 교수 역시 “매우 놀랍고 역사적인 결과”라고 로이터통신에 말했다. 그는 “프아타이당은 이미 끝난 포퓰리즘 정책으로 잘못된 전쟁을 치른 반면, 전진당은 제도적 개혁이라는 다음 단계의 싸움으로 나아갔다”고 분석했다.

‘확실한 군부 퇴진’까지는 난항

‘군부 대 반군부’ 구도가 그 어느 때보다 선명했던 이번 총선에서 군부가 압도적으로 패배했다는 사실만큼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군부 계열 팔랑쁘라차랏당(PPRP)과 루엄타이쌍찻당(RTSC)은 각각 41석과 36석에 그쳤다. 민심은 지난 9년간의 군부 집권기에 싸늘한 심판을 내렸다. 쿠데타로 집권한 쁘라윳 짠오차 현 총리는 사실상 ‘정계 은퇴’ 수순에 접어들 전망이다.

다만 전진당과 민주 진영이 아직 승리를 만끽하기엔 이르다. 여건이 녹록지 않기 때문이다. 의원내각제를 따르는 태국에서는 연립정부를 어떻게 구성하느냐, 총리가 누가 되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군부가 심어놓은 함정이 여기에 있다. 총리가 되려면 상원(250석)과 하원(500석)을 합쳐 과반인 376석 이상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 상원은 군부가 지명한 이들로 채워져 있다. 하원에서 전진당과 프아타이당을 합친 293석으로는 턱없이 모자란다. 결국 연정과 군부 회유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다.


태국 방콕에서 전진당(MFP)의 총선 승리 퍼레이드가 열린 지난 5월 15일(현지시간) 전진당 지지자들이 피타 림짜른랏 대표와 당원들이 탄 차량 주변을 에워싸고 있다. / AFP연합뉴스

태국 방콕에서 전진당(MFP)의 총선 승리 퍼레이드가 열린 지난 5월 15일(현지시간) 전진당 지지자들이 피타 림짜른랏 대표와 당원들이 탄 차량 주변을 에워싸고 있다. / AFP연합뉴스

지난 5월 22일 전진당은 프아타이당 등 다른 7개 정당과의 연합을 구성했다. 이들은 이날 모두 23개 항목으로 구성된 양해각서(MOU)를 발표했다. 향후 연정을 꾸리는 일에 뜻을 모으기로 했다. 이로써 전진당은 하원 500석 중 313석을 확보했다. 총리 당선을 위한 ‘매직넘버’인 376석에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간 셈이다.

양해각서에서 전진당의 간판 공약이었던 ‘왕실모독죄(형법 제112조) 개정’은 생략됐다. 태국 형법 제112조에 규정된 일명 왕실모독죄는 왕실 구성원·왕가의 업적을 모독하거나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경우 최고 징역 15년에 처하도록 한다. 학생들을 비롯한 민주 진영은 오래도록 이 법의 개정 혹은 폐지를 주장해왔다. 전진당은 이번 총선에서 유일하게 제112조 개정을 약속한 당이었다. 하지만 프아타이당을 비롯한 다른 당이 왕실모독죄를 건드리는 것을 부담스러워한다는 분석이 많았다. 결국 전진당이 집권 및 정부 구성을 최우선 목표로 하면서 이를 나중으로 미룬 것으로 보인다. 피타 대표는 “전진당은 단독으로 의회에서 왕실모독죄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앞으로 군부와 왕실이 진보 세력의 선전에 어떻게 반응할지도 미지수다. 군부가 다시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가 존재하긴 하나, 쿠데타는 군부로서도 치러야 할 비용이 크다. 쿠데타가 성공하려면 왕실의 묵인 내지는 비호가 필요한데, 현 국왕은 국민 사이에서 그다지 신망이 두텁지 않다. 특히 옆나라 미얀마가 쿠데타 이후 2년 넘게 사실상 내전 상태에 빠져 있는 점을 감안하면, 군부로서는 더 쉬운 선택지를 노릴 수도 있다. 예를 들어 2020년 헌법재판소를 통해 퓨처포워드당을 해산했듯, 사법제도와 소송 등으로 탄압에 나서는 방법이 가능하다.

당장은 전진당이 상원을 회유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최근 방콕포스트 등 현지 언론은 상원의원 몇몇이 피타 대표 지지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전했다. 전진당 내부에서도 ‘유권자의 뜻’을 내세워 상원 설득이 가능하리라는 관측이 흘러나왔다. 상원은 그러나 기본적으로 보수 왕당파로 구성돼 있다는 점에서 섣불리 희망에 기대기는 어렵다. 피타 대표도 “전진당은 정부 구성에 관해 상원의원들과 회담하고 있다. 낙관적이긴 하지만 몇몇 장애물이 존재한다”고 인정했다.

국민의 뜻이 표심으로 분명하게 드러났는데도 여전히 군부 세력이 민주화의 키를 잡고 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이 대목에서 태국 청년활동가 네띠윗 초띠팟파이산(27)이 최근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한 말을 인용한다. “태국 국민은 민주주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 태국 군부와 상원이 꼭 새겨들어야 할 내용이다.

<김서영 기자 westzer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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