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로 일하면서 눈이 확 트이는 듯한 독서경험을 한 적이 몇 번 있다. 일의 특성상 이론과 현장의 이야기가 깊이 있게 맞물린 책을 만나면 갈증이 해소되는 듯한 반가움을 느낀다. 이명박 정부의 출현 배경을 여론의 심층으로 파고든 분석서 <분노한 대중의 사회>(김헌태·후마니타스)가 그랬고, 최근 읽었던 책 중에는 <그림자를 이으면 길이 된다>(연대자D·동녘)가 그랬다.

박송이 기자
성폭력 범죄에 법원이 솜방망이 처벌을 내렸다는 기사들을 볼 때마다 도대체 왜 이런 판결이 나왔는지 납득할 수 없었다. 판사들의 성인지감수성 부족을 비판하곤 했지만, 단지 그것뿐인지 막연하고 답답했다. <그림자를 이으면 길이 된다>는 현 사법시스템이 어떻게 성폭력 피해자를 배제하고 소외시키는지를 날카롭고 생생하게 보여준다. 책을 읽고 나면 이 문제를 바라보는 시야는 넓어지지만, 답답한 현실에 화가 나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다.
‘가장 보통의 준강간’ 사건은 대법원 무죄 확정이 나기까지 6년이 걸렸다. 163개 시민단체는 2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자 ‘준강간 사건의 정의로운 판결을 위한 공동대책위(공대위)’를 꾸려 대응해왔다. 공대위가 이 사건을 ‘가장 보통의 준강간 사건’이라고 명명한 이유는 만취여성에 대한 성폭력이 성폭력 상담사례에서 흔히 볼 수 있을 정도로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어서다.
이 사건의 최초 신고부터 대법원 무죄판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그림자를 이으면 길이 된다>가 말하는 사법시스템의 문제점들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공대위도 “2017년 본 준강간 사건의 발생부터 신고, 항소심 판결 그리고 대법원 선고에 이르기까지 사법적 의무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피해자의 권리가 완전히 배제당했다”며 사법시스템 전반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늘 문제로 지적됐던 ‘피해자다움’에 대한 강요도 여전했다. 2018년 4월 대법원 판결에 ‘성인지감수성’이라는 개념이 처음으로 등장했다. 하지만 ‘가장 보통의 준강간’ 사건을 통해 바라본 사법시스템은 여전히 가해자 중심이며, 성인지감수성과도 동떨어져 있었다.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