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장쑤성 양저우시 ‘루시옌’
그대는 서쪽 황학루와 작별하고(故人西辭黃鶴樓·고인서사황학루)
아름다운 꽃 피는 삼월 양주로 가네(煙花三月下揚州·연화삼월하양주).
외로운 돛대 먼 그림자 푸른 허공으로 사라지고(孤帆遠影碧空盡·고범원영벽공진)
보이는 건 아득히 흘러가는 장강뿐이로구나(惟見長江天際流·유견장강천제류).

17대 국회의원 시절인 2006년 10월 10일 완원가묘 복원 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된 완원기념관을 들른 최재천 변호사 / 최재천 제공
아지랑이 피어나고 봄꽃 날리던 2005년 4월, 이태백이 1300년 전 노래했던 음력 3월, 중국 장쑤성 양저우에 갔다. 옛 당성(唐城)과 운하, 꽃과 호수가 어우러진 강남의 봄날이었다.
2004년 제17대 국회에서 일하게 됐다. 그해 가을 양저우시의 외판(外辦)주임 정장화(丁章華)라는 분이 찾아왔다. 놀랍게도 양저우시가 당성 유적지 내에 경주 최씨의 시조 고운(孤雲) 최치원 선생을 기리는 기념관을 건립하고 있다고 했다. 고운 선생이 벼슬을 지냈던 중국 지방정부가 그걸 잊지 않고 기념관을 건립해준다니, 고마운 일이었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수년 전 경주 최씨 출신 어느 정치인이 양저우를 다녀갔다고 했다. 말을 빌자면 그의 약속은 이랬다.
“경주 최씨를 포함한 최씨 성을 가진 사람이 우리나라에 120만명 정도 살고 있다. 최씨 종친회가 나서서 1만원씩만 모으면 120억원이다. 그렇게 모아 우리가 기념관 건립에 보태겠다. 걱정하지 말라.”
17대 총선이 끝나고 나자 양저우시는 경주 최씨 성을 가진 사람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가 누구인지를 찾았다고 했다. 그렇게 만나게 됐다. 하지만 막막했다. 외교 경험도, 정치 경험도 일천한 나에겐.
“그건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정 주임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그럼 양저우시에 돌아가서 뭐라고 보고를 해야 합니까. 지금까지 중앙정부 승인 아래 해온 사업은 앞으로 어떻게 진행해야 합니까.”
이번에는 내 얼굴이 빨개졌다.
“….”
“꽃피는 삼월(煙花三月) 양저우에 한번 다녀가시지요. 오셔서 한번 상의해주시지요.”
“그러겠습니다. 꼭 가겠습니다. 고운 선생 후손으로서 뭐라도 할 수 있을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그때만 해도 한국과 중국은 서로를 너무 몰랐다. 사람들끼리도 당연히 그러했다. 중공이 중국이 된 지, 수교한 지 채 10년도 안 된 때였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거친 과장조차 누군가에겐 기대로, 벅찬 약속으로 받아들여졌으리라. 당시 나는 그렇게 이해했고, 그렇게 설득했다.
영빈관에 짐을 풀고 양저우시 당서기와 회담을 했다. 막 건립을 끝낸 소박한 고운 선생 기념관을 찾아 예를 올렸다. 약속의 무게를 존중하려 애를 썼고, 작은 힘이라도 보태보겠다고 사적인 약속을 건넸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가 나라와 나라 사이 신뢰의 근본이니까.

우여곡절 끝에 중국 장쑤성 양저우시에 들어선 최치원 선생 기념관 개관 행사가 2008년 10월 15일 열렸다. / 최재천 제공
양저우시는 중국 운하의 시발점이다. 2500년 전 처음 운하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예로부터 중원과 남북의 산물이 모두 모이는 최고의 상업도시이자 교통의 중심이었다. 고대 이래 내륙 수도는 물류의 중심이었기에 가장 중요한 물품인 소금을 거래하는 상인들이 양저우로 몰려들었다. 한참 뒤인 청나라 시절, 소금 상인들은 축적된 부를 바탕으로 저택을 건립하기 시작했다. 중국 특유의 검은색에 가까운 잿빛 벽돌로 운하 근처에 자신들의 사저를 짓고 그 옆에 소금가게를 두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건 없다. 역사는 장강 따라 황해로 흘러갔고, 소금 상인들의 권력도 빗물에 소금 녹아내리듯 서서히 흩어졌다. 그럼에도 소금 상인들의 집들은 남았다. 이름하여 ‘염상고택(鹽商故宅)’이었다. 그곳에 귀빈용 식당이 있었다. 마당을 가운데 두고 집이 사방으로 둘러싸여 있는 중국의 전통 양식-사합원(四合院) 형식-으로 지은 이층짜리 건물이었다.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이층 베란다에서 마당으로 빨간 등불이 매달려 있었다. 정 주임이 그곳으로 만찬을 초대했다.
중국 4대 요리 중 하나로 화이양(淮揚) 요리가 있다. 양저우가 중심이다. 1949년 신중국이 성립하던 날 밤, 만찬이 열렸다. 당시 메뉴를 책임졌던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는 양저우 요리를 메인으로 선택했다.
화이양 요리의 특징은 비교적 달콤하다. 맵지 않다. 민물고기 요리가 많다. 양저우 요리를 쉽게 떠올리는 방법 중 하나는 양저우 볶음밥이다. 하얀 쌀밥에 달걀과 달인 파, 몇몇 조미료를 섞은 담백한 맛의 달걀볶음밥. 지금 유행하는 마라샹궈와는 정반대의 맛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때 화이양 요리를 제대로 맛봤다.
고운 선생에서 시작된 인연이 다음 인연을 만들었다. 존경하는 완당(阮堂) 김정희(金正喜) 선생의 청나라 때 스승인 운대(芸臺) 완원(阮元) 선생의 고향이 고맙게도 양저우였다. 계기가 되어 완원 선생의 묘소와 완원가묘(阮元家廟)를 복원하고 성역화될 수 있도록 도왔다. 추사 선생의 후손과 운대 선생의 후손이 서울에서 만나는 행사를 기획했다. 선대들이 만난 지 201년 만이었다. 상호 교차 방문도 만들었다. 그러다 청나라 시절 양저우의 소금 상인 중에 조선 출신의 안기(安岐)라는 유명한 상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안기 선생은 중국 당대 최고의 서화 수집가이기도 했다. 염상고택이 더한 무게로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그땐 아니었지만 지금 염상고택에는 멋진 레스토랑 ‘루시옌’(No. 22, Kangshan Street, Guangling District)이 들어섰다. 성업 중이다. 맘만 먹으면 누구나 찾아갈 수 있다.
왜 하필 가기 힘든 곳을 소개하냐고 물을지 모른다. 음식은 그저 먹는 행위를 넘어선다. 역사성과 결합되는 경험이다. 공간이기도 하고, 여러 사람의 일이기도 하다. 먹는다는 것은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이다. 서로를 나누는 순간이다. 서로에 대한 신뢰를 쌓아가는 일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식구가 된다. 심지어 나라의 정상끼리도 국빈 만찬이라는 이름으로 저녁식사를 함께하며 의미를 부여한다. 한·중 간 사드 문제로, 코로나19로 길이 드문드문해졌다. 양저우에 다녀온 지 벌써 10여년이 되어간다.
검은 회색빛 벽돌 건물의 좁다란 골목 사이로 소금 상인이 되어 옛길을 걸어가면 그곳에 염상고택이 있다. 화이양 요리가 나온다. 마지막엔 양저우 볶음밥이 나올 거다.
<최재천 법무법인 헤리티지 대표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