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주간 전 세계를 달군 미 국방부 기밀 유출 용의자가 지난 4월 13일(현지시간) 체포됐다. 온라인게임 채팅 플랫폼 ‘디스코드’의 한 비공개 채팅방에 기밀문서 수백장을 유출한 것으로 지목된 닉네임 ‘OG’의 정체는 다름 아닌 현직 군인이었다. 검거된 용의자는 미 공군 주방위군 소속 잭 테세이라(21) 일병으로, 방위군 내 정보 관련 부서에서 일하고 있었다.
한국 등 동맹국에 대한 광범위한 도청 정황을 담은 기밀문서를 두고 한국 정부는 문건 상당수가 ‘위조’됐다고 주장해왔지만, 이번 체포로 기밀문서들이 미군 내부에서 유출됐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대통령실은 미국의 도청 의혹에 대한 언론 보도가 잇따르자 “언론은 자국 국익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며 한국 언론에 노골적으로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지만, 논란이 쉽사리 가라앉지는 않을 모양새다. 미국 언론은 용의자 체포 후에도 대통령실의 표현대로라면 ‘자국 국익’에 부합하지 않는 유출 문건 보도를 연일 쏟아내고 있다.
펜타곤 기밀 유출 파장 계속
한국 정부는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국빈 방문 전 이번 논란을 서둘러 봉합하려는 기류가 역력하지만, 여전히 의문점들은 해소되지 않은 상태다. 일단 대통령실은 문서가 ‘위조’됐다고 밝히면서도 이런 판단을 내린 근거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1급 기밀(TOP SECRET)뿐만 아니라 동맹국에 대한 도청 정황이 담긴 문서가 공개되자, 일각에서는 동맹국을 분열시키기 위한 러시아의 조작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미 연방수사국(FBI)의 용의자 검거로 ‘러시아 조작설’ 역시 무색해진 상태다.
미국 정부는 유출 문건에 담긴 정보의 진위 여부는 일절 확인하지 않고 있지만, 문건 자체의 신빙성은 인정한 상태다. 앞서 미 국방부는 유출 문건이 지난 2월 28일, 3월 1일자 자료라고 특정했고, FBI가 테세이라를 기밀 문건의 미승인 반출 및 보유 혐의 등으로 기소하면서 유출 문서가 미 국방부 자료임을 확인했다.
다만 미국은 유출 사태 초기부터 기밀의 진위 등 “문서 자체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게 제한적”이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패트릭 라이더 미 국방부 대변인은 4월 13일 “기밀 정보가 다른 곳에 게시됐다는 게 ‘기밀 해제’라는 뜻은 아니다”라며 기밀 정보를 확인해주지 않겠다고 밝혔다.
유출 문건의 ‘위조’ 범위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전략소통조정관은 4월 10일 백악관 브리핑에서 “(문서 중) 일부가 조작됐다는 것을 안다”고 말했다. “일부 사례의 경우 우리가 알고 있는 원래 소스에서 변경됐다”는 설명이다. 문서 위조 범위가 ‘상당수’라고 밝힌 한국과 ‘일부’라고 한 미국의 온도 차가 드러난 대목이다.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은 한·미 국방장관이 통화에서 “공개된 정보 상당수가 위조됐다는 데 한·미의 평가가 일치했다”고 밝혔는데, 미 국방부는 이 통화와 관련해서도 “특정 문서에 대해 언급하지 않겠다”(사브리나 싱 국방부 부대변인)며 말을 아꼈다.
용의자가 체포되며 유출이 군 내부자의 소행임이 드러나자 한국 정부 고위 당국자는 “정부도 (미국의 도·감청 사실이 없었다고) 확정하지 않았다”고 슬그머니 말을 바꿨다. “도청 의혹은 터무니없는 거짓 의혹”, “문서 상당수가 위조됐다”고 강경하게 일축하던 기존 입장에서 물러선 것이다.
현재까지 외신 보도 등을 통해 위조가 명확하게 ‘확인’된 대목은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한 양측의 사상자 숫자 등 피해 집계치를 다룬 대목이다. 당초 유출된 기밀문서들은 디스코드 내 비공개 채팅방에서만 공유되다가 트위터·텔레그램 등 소셜미디어를 통해 확산됐는데, 해당 문서가 친러시아 텔레그램 계정을 통해 유포되는 과정에서 숫자가 위조된 것으로 파악됐다. 당초 디스코드에 올라온 사진과 달리 러시아 측 손실을 축소하고 우크라이나 측 손실을 부풀리는 방식으로 조작됐다. 다만 숫자 ‘6004’에서 ‘4’를 빼 ‘600’으로 표기하는 등 단순한 수준이다.
과거와 달라진 동맹국 반응
미국이 적국은 물론 동맹국과 유엔 등 국제기구에서도 광범위하게 정보를 수집해왔다는 사실이 새로운 일은 아니다. 다만 동맹국들의 반응이 과거와 달라졌다. 2013년 미 중앙정보국(CIA) 출신 에드워드 스노든이 미국 정부가 동맹국 정상을 상대로 도·감청 등 스파이 활동을 벌였다고 폭로했을 때는 각국이 강력 반발했다. 이번에는 그러나 ‘부인’ 외에 별다른 반응을 내놓지 않고 있다.
한국을 비롯해 이스라엘, 프랑스, 영국, 아랍에미리트, 이집트, 튀르키예 등 유출된 문서에 언급된 상당수 국가가 자국 관련 내용을 부인했다. 한국을 제외하고 이들 국가가 부인한 기밀문서 내용은 대체로 외교관계에서 자국에 불리한 것들이다. 이집트가 러시아를 위해 무기 생산에 나섰다거나, 프랑스와 영국이 우크라이나에 자국군을 파견했다는 내용 등이다.
다만 이들 국가는 문서가 거론한 자국 관련 첩보의 내용이 ‘허위’라고 밝혔을 뿐, 한국 정부처럼 문건의 위조 여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번 사태와 관련해 미국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에 나선 것은 사무총장 등 고위 관리의 사적 대화까지 도청당한 유엔과 멕시코뿐이다.
스노든 폭로 당시에는 독일에서 CIA 지국장이 쫓겨나고 수도 베를린에서 시민 수천명이 항의시위를 벌였다. 앙겔라 메르켈 당시 독일 총리는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직접 항의했고, 프랑스는 미국 대사를 초치했다. 브라질 대통령은 미국 방문을 전격 취소했다.
미국 언론도 동맹국들의 이런 ‘달라진 반응’에 주목했다. 뉴욕타임스는 “2013년과 달리 동맹국들이 미국의 명백한 스파이 활동을 대부분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는 것으로 보인다”면서 “이집트, 이스라엘, 한국, 아랍에미리트 정부는 자신들의 내부 논의 내용을 담은 유출 문건의 내용이 가짜이거나 조작됐다고 평가하지만, 감시 자체에 대해서는 전혀, 또는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선명수 국제부 기자 sm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