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익광고에 꽂힌 광고장이 이제석씨
이제석씨(41)는 여전히 ‘똘끼’가 충만해 보였다. 자신감도 넘쳤다. “무언가로 막히면 뚫릴 때까지 계속 두드린다, 반드시 뚫어버린다”고 말했다.
그는 세계가 인정한 ‘광고장이’다. 지방대 출신의 설움을 딛고 2006년 9월 미국으로 건너간 지 6개월 만에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공모제에서 수상했다. 대기오염의 위험섬을 경고하는 ‘굴뚝총’ 광고로 세계 3대 광고제의 하나인 ‘원쇼 페스티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뿌린 대로 거두리라(What goes around comes around)”는 카피와 함께 군인이 겨눈 총구가 결국 자신에게 돌아오는 반전 포스터는 세계 유수의 공모전에서 동시다발로 메달을 따내는 기염을 토했다. 그는 미국에서 가장 큰 광고회사인 JWT와 BBDO를 거쳐 FCB에 입사했다. 빅히트작을 연달아 선보인 그에게서 ‘부’와 ‘명예’를 거머쥔 장밋빛 미래를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2009년 돌연 한국으로 돌아왔다. 원하는 광고를 하고 싶어 같은해 ‘이제석 광고연구소’를 차렸다. “공익광고의 개척자가 되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그리고 14년이 흘렀다. 그동안 이제석 광고연구소가 제작한 광고의 80% 이상은 공익광고다. 설치미술형 광고와 퍼포먼스형 광고, 게릴라 캠페인과 인쇄 광고 캠페인, 포스터 등 다양한 방식으로 세상을 향해 말을 걸었다. 광고주는 주로 지자체나 관공서, NGO단체다.
지난 3월 14일 찾아간 경기 고양시의 이제석 광고연구소 외관은 투박한 컨테이너처럼 보였다. 폐차 직전의 낡은 자동차 몇 대가 놓인 1층은 용접 등을 하는 공장으로 사용하고, 넓은 공간에 책걸상 몇 개와 응접세트가 전부여서 황량해 보이기까지 한 2층은 회의실로 이용한다고 했다. 도시의 소음이 싫어 본진은 서울 마포에 둔 채 작업실만 이곳으로 옮겨 왔다고 했다.
뉴욕 초대형 광고회사서 상업광고에 염증
식량 기부 자선단체 공익광고 작업서 눈떠
“기발하고 재미있는 공익광고 만들려 창업”
-창업 후 작업한 작품의 8할이 공익광고예요. 왜 공익광고에 꽂혔습니까.
“꿈꾸던 뉴욕 한복판의 초대형 광고회사들에 다니면서도 저는 뭔가 늘 허전함을 느꼈어요. 아이디어는 분출하는데 시키는 일만 하자니 답답했어요. 사람들을 끝없이 자극해 헛된 욕망을 갖게 하는 상업광고 시장에도 조금씩 싫증 나기 시작했고요. 그런 와중에 제가 다니던 FCB에서 식량 기부 자선단체 ‘시티 하비스트’의 공익광고를 제게 맡겼고 즐겁게 작업했어요. 미국에선 광고회사들이 NGO 광고를 의무적으로 할당 제작하거든요. 뉴욕타임스 등 신문사도 수억원짜리 지면에 이런 공익광고를 공짜로 실어주고요. 학생 시절에도 공모전 출품을 위해 공익광고 제작을 많이 했지만, 이 작업을 하면서 공익광고의 가치에 더 눈을 떴어요.”
-그 가치는 어떤 것일까요.
“어떤 광고가 사람들을 기쁘고 행복하게 할 수 있을지 생각해본 적이 있어요. 좋은 옷과 고급 아파트, 비싼 자동차를 소비하게 하는 것보다 배고픈 사람이 밥을 먹게 해주고 얼어 죽을 것 같은 사람에게 옷을 입혀주는 게 훨씬 더 행복한 광고라고 생각해요. 죽어가는 사람 살리고, 힘들어하는 사람을 기사회생하게 하는 광고가 더 가치 있다고 판단하고요.”
-그 일을 시장이 큰 미국에서 하면 더 파급력이 클 텐데요.
“제가 세계 공모전 수상으로 유명해지면서 한국에서도 광고 의뢰가 드문드문 있었어요. 출장차 한국을 오가다 초기 사업자금 문제나 업무의 난이도 면에서 한국에서 일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어요. 한국에서 통하면 세계에서도 통할 수 있다고 믿었고요. 그래도 2012년까지는 뉴욕에도 제 사무실이 있었어요. 그러다 결혼하고 아이도 생기면서 아예 한국에 뿌리를 내린 거예요.”
이태원 참사 후 ‘위험 구간 표지판’ 작업 등
광고주 의뢰 없는 자발적 캠페인 벌이기도
“광고는 누가 듣건 말건 그냥 귀에 박는 것”
-천성이 따뜻하거나 혹은 사회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키겠다는 의지가 강한 건가요.
“오해와 편견이에요. 저는 그런 사람은 아니에요. 그저 광고장이로서 제 작업에 대한 욕심이 있을 뿐이에요.”
-창업 당시 ‘공익광고 개척자가 되겠다’는 말을 했지요.
“당시 한국은 크리에이티브의 불모지였고, 공익광고 하면 공익광고협의회만 생각나던 때였어요. 완성도 면에서 아쉬운 면이 많았죠. 단순히 도덕적인 이야기나 올바른 주장을 한다고 해서 공익광고가 아니거든요. 광고를 접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그들이 전화를 걸거나 후원을 하는 등의 실제 행동을 이끌어내고, 사용자의 욕구 해결을 전제로 완성해야 해요. 그러려면 관련 기관들과의 협업이 굉장히 중요하죠. 저는 자신 있었어요. 공익광고를 기발하고 재미있게 만든 거장으로, 그래서 국가의 자랑으로 남을 수 있겠다고 판단했어요.”
-지난 14년간 완성한 광고가 몇 건이나 되나요.
“500건 가까이 될 겁니다.”
-작업은 재미있습니까.
“굉장히 즐겁고 보람되고 뿌듯해요. 광고주의 의뢰로 제작하는 경우도 있지만, 술자리 대화를 하다 자발적으로 마음이 동해 시작하는 일도 많아요. 지난해 8월 홍수 때 ‘깨끗한 빗물받이’ 캠페인을 벌인 것이나, 이태원 참사 직후 압사 사고 위험 구간 표지판을 만들어 홍대 앞 좁은 골목 등에 부착하는 캠페인을 벌인 것 등이 그런 사례예요. 작업의 퀄리티가 높지는 않아요. 이런 캠페인은 타이밍이 중요해 전광석화처럼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짧게는 1주일, 길게는 2주 안에 모든 것을 준비해야 하거든요.”
소외계층을 위한 광고를 비롯해 장애인 인권,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광고, 기아와 식수, 범죄와 치안, 환경 그리고 국가를 위한 광고 등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수많은 광고가 그의 손을 거쳐 탄생했다. 경향신문, 한겨레, 매일신문, 조선일보, 국민일보 등 신문사와 컬래버 작업도 수차례 했다. 특히 2016년 창간 70주년을 맞은 경향신문 1면의 파격적 편집디자인은 큰 화제를 모았다. 컵라면과 삼각김밥을 올려놓고 ‘오늘 알바 일당은 4만9천원…김영란법은 딴 세상 얘기. 내게도 내일이 있을까?’라는 메모를 적은 디자인이다.
-뉴욕에서 지내던 2008년 7월 미국 뉴욕의 심장부인 맨해튼 거리 곳곳에 “STOP ISLAND THEFT.”(섬 도둑질 그만) 문구와 함께 일장기로 복면을 한 도둑 형상의 설치 광고를 해 주목을 끌었어요. 이후에도 2009년 덴마크에서 열린 제15차 유엔기후변화협약 총회 행사장에 주최 측의 허락을 받지 않고 코끼리똥 사진을 걸었고요. 이런 게릴라성 광고를 자주 하는 것 같더군요.
“광고는 굉장히 폭력적인 거예요. 누가 듣든 안 듣든 상관없어요. 영화는 극장에 가서 돈 주고 보지만, 광고는 그냥 귀에다가 박는 것이거든요. 일일이 허락받으면 어느 천년에 뜻을 이루겠어요. 제가 그동안 수상하고 히트친 작품 상당수가 이런 식으로 보여준 것들이에요.”
-광고주는 주로 지자체나 관공서, NGO단체예요. 돈이 되지 않을 것 같은데, 회사의 재정상태는 괜찮습니까.
“지자체나 관공서는 예산이 있어요. 공익광고 제작으로 많이 벌지는 못하지만 그걸 보충하기 위해 다른 사업도 겸하며 열심히 뛰고 있습니다. 하하하….”
-어려운 점은 없나요.
“결국은 공익이 뭐냐는 근본적 고민을 해요. 가장 힘든 점이에요. 모두가 공익이라고 주장하니까요. 심지어 JMS 정명석 같은 자도 자기가 공익이라고 주장할걸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저는 방패 앞에 선 시위대와 방패 뒤에 선 공권력 모두와 일해요. 양측 모두 자신들이 공익이라고 주장하죠. 또 극단적으로 진보적이거나 보수적인 사람과도 만나요. 이들 역시 서로 자기 말이 맞다고 열변을 토해요. 때로는 저도 헷갈려요. 그러면 산술적으로 따져 다수의 사람에게 이익이 가는 쪽을 선택한다고 했을 때, 소수는 어떻게 되느냐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죠. 공익이라는 말이 정말 위험하고 조심스러운 단어라는 생각이 들어요. 차라리 공익 대신 공공이라는 말을 쓸까 고민하기도 했어요.”
광고주는 주로 지자체, 관공서, NGO단체
공익광고 수입 크지 않아 다른 사업 겸해
“계약 기준은 어떤 사람인가…진정성 보죠”
-광고 수주 여부의 선택 기준이 있습니까.
“광고주가 어떤 사람이냐가 기준이에요. 상업광고를 거의 안 하긴 하지만 이 기준은 상업광고 수주 여부를 결정할 때도 동일해요. 완장 찬 것처럼 매너 없는 사람과는 일하고 싶지 않아요. 진정성이 느껴지는 분들과 일하면 행복해요.”
그는 인터뷰 내내 ‘사람’을 자주 언급했다. 그를 움직이게 하는 것도, 행·불행을 주는 것도 ‘사람’인 듯했다.
-신문 인쇄 광고나 방송 광고처럼 전통매체를 통한 광고보다 옥외 광고나 캠페인, 퍼포먼스 같은 비전통, 비정형 매체 광고를 주로 하는 이유는 뭔가요.
“표현의 자유 때문이에요. 전통매체를 이용하는 광고는 규제가 너무 많아 심의를 통과하는 게 쉽지 않아요. 별것도 아닌 것을 트집 잡아 방송을 못 하게 하는 경우도 왕왕 있어요. 그로 인해 실제로 완성했으나 공개하지 못한 광고도 많았고요. 크리에이티브가 훼손된다는 생각이 들어 저는 아예 길바닥에다 광고를 하기 시작했어요. 스트리트 광고죠. 그게 대박이 나 TV 뉴스에도 보도되면서 지금까지 그걸로 먹고사는 거예요.”
-한국이 유난히 규제가 심한가요.
“심하죠. 유교 전통을 지닌 국가인 데다 인권 감수성 이슈 때문인지 사고가 대단히 경직돼 있어요. 민원도 많고요. 그러니 공중파 방송 등의 광고는 표현의 제약이 심해요.”
-그럼에도 한국에서 계속 작업하는 이유는 뭔가요.
“양날의 칼이기 때문이에요. 정서적 검열 등 각종 규제가 발목을 잡지만, 그런 문화적 토양 때문에 저 같은 놈이 더 돋보일 수 있으니까요.”
-무슨 얘기인가요.
“매스컴은 제게 ‘광고천재’라는 과한 수식어를 붙여줬어요.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제가 하는 광고는 개념광고라고 해서 이미 해외 광고 선진국에서는 활발했던 장르예요. 뭔가를 비틀고 후려치고 한 번 돌려서 생각하게 하는 이미지 광고를 그동안 한국에서는 볼 수 없어 쇼킹하게 받아들였을 뿐이죠. 한국은 이전까지 읽기 위주, 즉 카피 위주의 광고나 연예인 중심의 광고만 해왔으니까요. 그래서 제가 더 돋보일 수 있었던 거예요. 마이너스 요인을 다르게 보면 성공의 발판이 돼요. 주어진 핸디캡을 잘 이용하면 플러스 요인이 되고요.”
그는 “한국에서 사막과 오아시스를 동시에 봤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저한테 가끔 ‘너희는 왜 관공서라는 가장 보수적 집단과 일하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어요. 저는 ‘꼰대니까’라고 대답해요. 꼰대니까 안 맞지만, 또 꼰대이기 때문에 저 같은 사람이 필요한 거거든요. 영화 <다크 나이트>에서 조커는 배트맨에게 ‘넌 나를 완성시킨다’고 말해요. 악의 화신 조커나 선의 화신 배트맨이나 서로가 있어야 존재의 의미가 있다는 이야기죠. 정반합의 개념이에요. 그래서 저는 세종시를 지옥이라고 생각해요. 공무원들에게는 날라리들이 필요한데, 그곳은 공무원 천지의 도시니까요.”
-이제석 광고의 특징을 한 마디로 어떻게 규정하나요.
“쉽고 단순한 광고, 직관적으로 설명하는 광고죠.”
-요즘도 자신을 ‘아이디어 중독자’라고 생각합니까.
“저는 일과 생활의 경계를 두지 않아요(웃음). 매 순간 아이디어를 짜내려 고심해요.”
-메모가 일상화돼 있다지요.
“영감이 사라지기 전에 반드시 기록해 둬야 하기 때문에 냅킨이든 뭐든 눈에 띄는 곳에 닥치는 대로 적어둬요. 예전에는 타고 다니던 자동차 내부 천장과 측면, 바닥에도 사인펜으로 마구 써놔 자동차 안이 온통 낙서투성이였어요. 과거와 달라진 점이라면 메모할 때 스마트폰을 많이 활용한다는 점이에요.”
-일하면서 생긴 스트레스는 어떻게 해소하나요.
“트럼펫 같은 악기를 불기도 했는데, 요즘엔 자동차 정비를 해요. 그렇게 육체를 써서 정비에 몰두하다 보면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되거든요.”
그는 1982년 대구 태생이다. 훗날 의사가 된 형과 달리 공부를 못하고, 수업 태도가 불량하다는 이유로 초등학생 때부터 교사들에게 툭하면 두들겨 맞았다. 책과 공책 여백마다 그려댄 만화가 그의 유일한 탈출구였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그림만으로도 4년제 대학에 갈 수 있다는 말에 죽도록 그렸다. 그렇게 들어간 계명대학교 시각디자인과를 수석으로 졸업했지만 그를 인정한 공모전도, 기업도 없었다. 동네 ‘간판장이’로 일하면서 명함집 사장에게까지 모멸당하자 독기를 품고 미국 유학을 결심했다. 1년간 미군부대를 들락거리며 그림을 가르쳐주고 영어를 배웠다. 2006년 9월 뉴욕 ‘스쿨 오브 비주얼 아츠(School of Visual Arts)’에 입학했다.
-미술적 재능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건가요.
“손재주는 금손으로 불렸던 어머니로부터, 예술적 기질이나 사이코적 면모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 같아요.”
-아버지가 어떠셨길래요.
“아버지는 대구의 유명 호텔 주방장이셨어요. 업계에서 나름 명성과 악명이 자자했던 분이에요. 굉장히 다혈질적이고 충동이 일면 불같은 사람이었어요.”
-아버지가 폭력적이었나요.
“난폭했어요. 모난 돌 취급을 받던 저는 욕도 많이 듣고 맞기도 많이 맞았어요. 아버지뿐만이 아니었어요. 동네 형들한테도 돈 빼앗기며 두들겨 맞았고, 교사들한테도 수시로 얻어 맞았죠. 제가 불우했던 청소년기를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잘 안 믿어요. 저도 굳이 다 말하고 싶지 않고…. 돌이켜보면, 보통 아이들이었다면 그런 상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청소년기를 우울하게 보냈겠군요.
“그런데도 저는 그렇게 우울하거나 공포에 치를 떨면서 잠을 못 자거나 하지 않았어요. 낙천적이라기보다는 멘털이 강했을 수도 있고, 어쩌면 그런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난 별 의미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며 때리면 맞고, 누워 있으라면 누워 있었어요.”
한국은 정서적 검열 등 규제 심하지만
덕분에 비전형적 광고로 더 돋보인 것
“오늘의 이제석 만든 건 생존본능이죠”
-그런 사람이 어떤 계기로 달라진 건가요.
“고등학생 때 제 그림을 보신 어느 선생님이 많은 용기를 주셔서 자존감을 조금씩 회복했어요. 그리고 스무 살 때 대학에 가서 평생 처음 장학금이라는 것을 받아본 거예요. 수석을 했어요. 그러니까 몸에 귀신이 들린 것처럼 20년간 참아왔던 서러움이 터지면서 잘해봐야겠다, 잘살아봐야겠다. 업신여김당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면서 초인적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어요. 눈 떠 있는 시간 동안 미친듯이 일하고 그렸어요. 뉴욕에서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렇게 맹수가 사냥하듯 일한 게 20년째예요.”
-무엇이 오늘의 이제석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까.
“생존본능이요. 그로부터 초인적 힘이 나와요. 살기 위해 정말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해요. 지금도 저는 생존을 위해 굉장히 몸부림치고 있어요. 쫓고 쫓기는 삶, 거기서 스릴과 희열을 느껴요. 만약 이 불씨가 꺼지면 저는 100% 우울증이나 무기력증 혹은 치매가 올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분주한 삶을 살고 있어요(웃음).”
<박주연 선임기자 jypar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