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신당하는 말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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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피해자는 왜 의심받는가

<불신당하는 말> 데버라 터크하이머 지음·성원 옮김·교양인·1만9000원

[신간]불신당하는 말 外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분석을 보면 2017~2018년 전체 성폭력 관련 기소 범죄 중 ‘성폭력 무고죄’가 차지하는 비중은 0.78%에 불과했다. 이중 실제로 유죄를 받은 무고죄는 6.4%에 그쳤다. 허위로 성폭력 범죄를 신고하는 사례는 극히 낮음에도 여성 피해자들은 끊임없는 ‘불신’의 시선에 노출된다.

저자는 성폭력 피해자를 무시하도록 구조화된 미국 형사 사법 체제의 결함을 전문가의 눈으로 분석하고 비판한다. 미국을 꼭 닮은 국내 형사 사법 체제의 현실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눈여겨볼 만하다.

저자는 여성 피해자가 사건을 고발한 후 경찰 수사, 검찰의 기소, 재판에 이르기까지 단계별로 피해자의 신뢰성이 폄훼되고 사건에 대한 인식이 왜곡되는 패턴이 있음을 증명한다. 피해자가 ‘대성통곡’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의심하고 수사를 진행하지 않은 경찰, 권력과 지위가 높은 남성 가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피해자 모르게 양형 거래를 한 검사, 성폭력 현장에서 현행범으로 체포된 명문대 재학생에게 미래를 걱정하며 형량을 대폭 감형해준 판사 등의 사례가 등장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는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를 비난하고 가해자를 옹호하는 ‘유형화된’ 방식의 흔한 사례다.

저자는 “신뢰성은 결국 권력의 문제”라고 결론을 내린다. 가해자에게 ‘기울어진 법’이라는 권력, 여성의 말을 불신하는 ‘남성’이라는 권력, 상류층의 말을 더 신뢰하는 ‘계급’이라는 권력 등이다.

대한민국은 ‘성폭력 무고죄 처벌 강화’를 공약으로 내건 후보가 대통령이 되는 나라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최근 강간죄 구성 요건을 기존 ‘폭행, 협박’ 등에서 ‘동의’ 여부로 바꾸는 일명 ‘비동의 간음죄’ 도입에 대해 “피고인이 억울하게 처벌받을 수 있다”며 반대했다.

▲‘좋아요’는 어떻게 지구를 파괴하는가
기욤 피트롱 지음·양영란 옮김·갈라파고스·1만8500원

[신간]불신당하는 말 外

SNS에서 누른 ‘좋아요’는 어떤 경로를 거쳐 다른 이들에게 전달되는 걸까. 스마트폰에서 시작해 모뎀과 해저케이블, 데이터센터까지 이르는 ‘좋아요’의 길을 따라가다 보면 디지털 세계가 육중한 물리적 실체를 가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자유주의 이전의 민주주의
조사이아 오버 지음·노경호 옮김·후마니타스·2만4000원

[신간]불신당하는 말 外

오늘날 모두가 민주주의자임을 자인하지만, 그 자체로 두려 하지는 않는다. 다른 가치 체계와 섞으려 하거나, 무언가를 통해 한정 내지는 제한하려 한다. 고대사를 통해 민주주의의 ‘원형’을 탐구하고, 권력자들이 진정 제한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비판한다.

▲작지만 큰 한국사, 인삼
이철성 지음·푸른역사·2만2000원

[신간]불신당하는 말 外

‘백제 인삼’은 6세기 중국에서 최고의 약재 대접을 받았다. 12세기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신은 ‘고려인삼’을 대외적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홍삼은 18세기부터 조선의 공식 수출품이다. 고대부터 한반도 최고의 특산물이었던 ‘인삼’을 통해 한국사를 읽어낸다.

<송진식 기자 truej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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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뒤척인다. 겨우내 마음 편히 잠을 자지 못해 머리에 스모그가 낀 듯 무겁다. 창밖을 보니 눈이 내린다. 이상기온이 일상이 돼간다. 기후변화의 징후인 3월 중순 눈 쌓인 풍경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고 불길하다. 자연 시스템의 불안정성만큼이나 정치와 사법 시스템 또한 아슬아슬하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둘러싼 사회적 긴장은 한국 민주주의가 직면한 불안정성을 드러낸다. 일만 년간 이어온 기후 안정성과 40여 년이 채 안 된 한국의 민주주의는 기간으로는 비할 데 아니지만, 우리 삶에 당연히 주어지는 조건으로 여겨졌던 점은 흡사하다. 이번 겨울 기후환경이든 정치체제든,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것들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 여실히 드러났다. 기후위기와 정치위기라는 무관해 보이는 두 위기는 사실 그 원인 면에서도 맞닿아 있는데, 효율과 성과가 최우선시되는 과정에서 다른 중요한 가치는 간과했다는 점이다. 한국사회는 산업화하는 과정에서 빠르게 성장하는 법을 배웠지만, 화석 연료 중심의 에너지 구조를 전환하는 데 게을렀고, 정치적 다양성과 세대 간의 이해를 구현하지 못했다. 우리는 경쟁을 통해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지만, 이제는 그러한 방식의 성장이 우리 사회를 갉아먹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