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반도체 깡패와 의치한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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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반도체지원법을 총괄 지휘하는 지나 러몬도 미 상무장관은 지난 2월 23일 조지타운대 강연에서 “반도체법의 최종 목표는 첨단 반도체 기술을 지닌 모든 기업이 연구개발과 대량 생산을 하는 세계 유일한 나라가 미국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며칠 전 발표된 이 법의 1차 세부 사항에는 ‘초과이익 공유’, ‘영업기밀 제공’, ‘군사 협조 우선’ 등의 독소 조항이 담겼다. 국방예산이 1000조원에 이르는 천조국 미국에서 겨우 50조~70조원 규모의 생산 보조금 지원 법안을 만들어 아시아 국가들이 지난 반세기 동안 축적해온 반도체 기술을 통째로 빼앗아가겠다는 이 발상에 조선일보까지 나서 미국을 ‘반도체 깡패’로 규정하고 나섰다.

미국은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전 세계를 대상으로 그 어떤 폭력적 행위도 불사해왔다. 윤석열 정부는 치열한 외교의 현장에서 이 끔찍한 과거를 잊어선 안 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5월 20일 경기도 평택시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을 방문해 윤석열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미국은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전 세계를 대상으로 그 어떤 폭력적 행위도 불사해왔다. 윤석열 정부는 치열한 외교의 현장에서 이 끔찍한 과거를 잊어선 안 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5월 20일 경기도 평택시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을 방문해 윤석열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과거 미국은 세계대전 종전 직후 브레턴우즈 체제를 구축하며 달러를 세계 기축통화로 만들었다. 이어 1970년대 만성적 무역 적자와 베트남전 비용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원유 거래를 오직 달러로만 가능하게 만들어 달러 패권을 구축했다. 미국은 너그러운 이미지를 견지하지만, 자신의 패권이 흔들리면 명분과 합리성을 모두 내팽개치고 위선과 폭력을 자행해온 국가다. 지금까지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던 국가들은 대부분 무릎을 꿇었다. 1980년대 일본은 엔화 가치를 강제로 끌어올린 ‘플라자 합의’와 이어 전개된 ‘미·일 반도체 협정’ 등을 통해 반도체 생산 기지의 지위를 잃었다. 1990년대 한국 자동차의 대미 수출이 급격히 증가하자 미국은 ‘슈퍼 301조’를 동원, 한국의 자동차 세제에 철퇴를 가했다.

이제 미국이라는 깡패국가가 자신의 ‘나와바리(세력권)’를 위협한다고 생각하는 상대는 중국이다. 이번 반도체법에는 보조금을 받으려면 향후 10년간 중국에 투자해선 안 된다는 조건이 분명히 명시돼 있다. 시진핑 주석은 미국에 대한 직접적 발언을 거의 하지 않지만,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은 중국의 공격에서 대만을 방어할 것”, “중국과 충돌을 원하지 않지만 군사적 우위를 유지할 것” 등의 발언을 쏟아내며 노골적으로 중국에 대한 미국의 우위를 지키는 정치적 전략을 구사 중이다. 역사를 돌아보면, 미국은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전 세계를 대상으로 그 어떤 폭력적 행위도 불사해온 국가였다. 윤석열 정부는 치열한 외교의 현장에서 이 끔찍한 과거를 잊어선 안 된다.

현재 한국을 둘러싼 국내외적 상황이 심각하다. 과거를 돌아보는 일만큼 대통령이 중요하게 기울여야 할 노력은 현재를 한치의 가감도 없이 철저하고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일이다. 윤석열 정부가 한국의 명운을 걸고 반도체산업을 성장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건 알겠다. 문제는 삼성이라는 하나의 대기업을 중심으로 메모리반도체 생산 분야에서만 확고부동한 독점적 지위를 누려왔던 한국 반도체산업의 미래가 그다지 밝지 않다는 점이다. 이는 대부분의 전문가가 지적하는 바다.

올해 들어 반도체 대중 수출이 급감하면서 최악의 무역수지 적자 규모를 연일 갱신 중이다. 미·중 신냉전이라는 새로운 현실 속에서 미국 반도체법과 한국 기업들의 중국 반도체공장 모두를 만족시켜야 하는 우리의 현실이 만만치 않다. 지난 수십년간 한국정부가 벌여온 반도체 정책의 헛발질로 우리는 어느새 완벽하게 대만에 우위를 빼앗겨버렸다. 이효승 네오와인 대표는 지난 몇십년간의 한국과 대만의 반도체 정책을 비교하면서 한국에서 왜 TSMC 같은 회사가 등장하지 않느냐는 질문 자체를 비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그게 나오는 게 이상한 것 아닌가?” 윤석열 정부가 야심차게 추진했던 반도체학과 증설의 결과는 지방대 반도체학과 절반의 미달로 끝났다. 정책의 실패는 누적된다.

이번에 대통령이 담대하게 결단을 내렸다는 ‘일본 강제노역 제3자 변제’ 해법도, 결국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를 푸는 등 경제적 실익을 겨냥한 대통령의 순수한 의도로 읽어낼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치열한 국제정치에 대한 나이브한 현실 인식이 가져올 피해는 오로지 한국 국민이 감당해야 한다. 일본은 우리 정부의 발표 직후, 반도체와 관련해서 오히려 더 고압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당장 니시무라 야스토시 일본 경제산업상은 “반도체 수출 규제는 징용과 차원이 다른 문제”라고 말했다. 일본은 미국에 의해 좌절된 일본 반도체의 잃어버린 30년을 되찾기 위해 이미 대만 TSMC 반도체공장을 규슈에 유치하고 오직 자국의 이익을 위해 달리는 중이다. 게다가 일본의 수출 규제로 이미 소부장(전기차 배터리, 반도체 소재와 자동차 부품, 제조를 위한 제조장비 등 부품·소재·장비 업종) 국산화가 이뤄지고 있는 시점에서 윤석열 정부의 과학기술 관련 현실 인식 능력은 우려스러울 정도로 나이브하다.

미래 코로나19 시기 한국의 IT 분야를 달구던 키워드는 메타버스였다. 메타버스를 하나의 광풍으로 만든 건 민간기업이 아니라 한국 관료집단이었다. 지자체들은 너도나도 메타버스 생태계를 구축한다며 설레발을 쳤다. 국민이 낸 세금 수십조원을 허접한 인터넷 가상공간 구축에 투입했다. 얼마 전 국내 금융사들의 메타버스 금융서비스가 이용자들에게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다는 뉴스를 읽었다. 지자체가 구축한 메타버스는 더더욱 심각하다. 대만 TSMC가 엘리트 관료들의 철저한 과학기술 패러다임 인식을 통해 한국을 추월한 지난 30여년간, 한국은 인터넷 공인인증서와 액티브 엑스로 대표되는 엘리트 관료들의 철저한 복지부동 속에 IT생태계 자체가 철저히 망가져 버렸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화려하게 내세우는 창조경제니 4차 산업혁명이니 하는 구호의 무용함은 이제 초등학생까지 알 정도다.

아직 한국의 미래가 그렇게까지 암울하지는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이해한다. 하지만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지난 정부들에서 관료들이 망쳐버린 과학기술생태계가 다시 살아나려면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 과학기술의 혁신에 눈감은 대가는 시간을 건너 반드시 우리 현실에 영향을 미친다. 문재인 정부에서 우버와 타다 등의 모빌리티 혁신에 눈감고 오로지 택시기사들의 표에 올인했던 결과, 우리는 심야에 택시조차 잡을 수 없는 나라에서 살게 됐다. 얼마 전엔 법률서비스 플랫폼 ‘로톡’이 변호사 단체와의 갈등으로 날개가 꺾였다. 타다 서비스 좌절의 데자뷔를 보는 듯하다.

대한민국 입시는 ‘의치한약수’라는 말로 요약된다고 한다. 모든 수험생의 희망이 의대 입학이 된 지금, 윤석열 정부는 도대체 왜 학생과 학부모들이 반도체학과가 아니라 의대로 향하는지 그 욕망을 분석해야 한다. 지난 17년간 3058명을 유지하고 있는 의대 정원의 문제 속에 반도체학과 해결의 실마리가 있을 것이다. 아직 희망이 있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한국이 1980년대 일본의 전철을 밟고 있다는 기시감이 떠나지 않는다. 윤석열 정부의 건투를 빈다.

<김우재 낯선 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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