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가족처럼 치료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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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5명의 일상과 환자들의 사연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 tvN 제공

의사 5명의 일상과 환자들의 사연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 tvN 제공

얼마 전 나한테 수술을 받고 잘 지내다가, 몹쓸 병이 다시 뱃속에 생겨 4개월이나 입원 치료를 받던 분이 돌아가셨다. 전공의 선생들이 볼 환자가 아니었기에 내가 직접 환자의 처방을 챙기고 간호사들의 연락을 받았다.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새벽에도 한두 번씩 전화를 받으며 수면 리듬이 깨어지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자는 둥 마는 둥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환자의 피검사 결과를 챙겨 처방을 내는 게 일상이었다. 그 와중에도 환자의 상태는 좋지 않아 6번이나 수술을 했고, 결국 패혈증으로 돌아가셨다.

환자의 임종을 지키며 유가족들과 면회를 조정해주고 토요일 새벽에 사망 선언을 한 뒤 모처럼 푹 잤다. 환자분이 돌아가셨을 때 슬픈 감정도 있었지만, ‘이제 더는 잠을 설칠 일이 없겠구나’ 하는 안도감이라고 해야 할지 혹은 후련함이라 해야 할지 모를 마음이 들었다. 마음 한편에서는 ‘내가 보던 젊은 환자가 죽었는데 이런 마음이 들다니 정말 제정신인가?’ 하는 죄책감도 같이 들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하지만, 항상 환자의 죽음 뒤에는 후회와 자괴감이 밀려드는 게 사실이다.

한번은 후배 외과 의사가 상태가 안 좋은 환자분들을 수술하고서, 너무 힘들다고 토로한 적이 있다. 그분들이 돌아가시면 자신의 잘못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든다고 했다. “그 환자가 돌아가셔서 그런 생각이 드는 것뿐이다. 잘 나아서 퇴원한 분들도 자세히 따져보면 분명 우리가 모든 과정에서 최선의 치료를 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너무 마음 쓰지 마라”는 식으로 조언을 해주었다. 사실 나도 그런 상황이 늘 낯설다.

거의 20년이 다 돼가는 기억인데, 전공의를 하던 시절이었다. 새로운 수술법으로 환자를 수술하다가 수술 후 상태가 안 좋아져 결국 돌아가시는 일이 있었다. 환자와 유가족들께서 너무나 착하고 마음이 좋으셔서 담당 전공의였던 나와 수술을 집도했던 교수님의 마음이 더욱 좋지 않았다. 당시 이미 그런 일을 수도 없이 겪었을 게 뻔한 교수님이 손에 음료수병 하나를 들고 망연자실하게 중환자실 당직실 의자에 앉아 계시던 모습이 잊히질 않는다.

이러한 과정을 계속 겪다 보면,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무덤덤해지는 경우가 많다. 환자에게 너무 감정을 이입하는 것 자체가 의사에게는 너무나 감정을 소모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나라 의료 특성상 의사 한 명이 너무 많은 환자를 돌봐야 한다.

<슬의생> 속 의사들의 ‘공감 과잉’에 대해

얼마 전에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시리즈를 매우 재미있게 봤다. 마침 거기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나와 나이가 같기도 했고, 특히 극중 외과 의사는 장기이식 담당이라 이 주제로 전공의들과 농담도 했다.

“야. 너희들 <슬기로운 의사생활> 봤어? 거기 나오는 이익준(조정석 분) 알지? 그거 모델이 나인 거 알았어?”

“어? 정말이요? 언제 교수님께 연락 온 거예요?”

“아니 연락 온 적은 없지만, 그 나이에 ‘천재 이식외과 의사’ 하면 나밖에 없지 않겠어?”

“….”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에 나오는 의사들은 하나같이 환자의 고통에 깊이 공감하다 못해 환자가 나빠졌을 때 함께 침울해 하는 모습을 보인다. / tvN 제공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에 나오는 의사들은 하나같이 환자의 고통에 깊이 공감하다 못해 환자가 나빠졌을 때 함께 침울해 하는 모습을 보인다. / tvN 제공

재미있게 드라마를 보면서도 이입이 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거기 나오는 의사들은 하나같이 환자의 고통에 깊이 공감하다 못해, 환자가 좋아졌을 때 기뻐하고 환자가 나빠졌을 때 같이 침울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대중이 원하는 이상적인 의사상을 투사한 것이라 생각한다. 실제로도 환자들은 실력은 약간 부족하지만, 공감을 잘해주는 의사들을 좋아한다. 반면 의사들은 소위 ‘싸가지’가 없더라도 실력이 좋은 의사를 더 높게 쳐준다는 조사 결과를 본 적이 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에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실제로 의사들이 행동하는 모습을 본다면, 환자와 가족들은 오히려 경험이 부족한 ‘풋내기 의사’라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심지어 ‘과연 저 의사가 실력은 있나’ 하는 의심마저 들지도 모르겠다. 때때로 의사란 결국은 패배가 정해진 전쟁터에서도 어떻게든 피해를 최소화하고 퇴각하는 역할도 해야 하는 지휘관이다.

이 칼럼을 쓰기 위해 요즘 유행하는 AI 채팅프로그램에 의사가 환자에게 얼마나 공감하는 것이 좋은지 물어봤다. AI는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해주었다.

“의료 종사자로서 의사들이 환자들에게 공감하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공감은 중요한 가치이고, 환자-의사 관계를 정립하고 환자에게 적절한 돌봄을 제공하는 데 유익하다. 그러나 의학적 치료를 하는 데 있어 감정에만 매몰되는 것은 객관성을 잃어버리게 하여 잘못된 진단과 치료를 유발할 수 있다. 게다가 오랫동안 환자의 고통과 스트레스에 노출되는 것은 의사들을 결과적으로 번아웃시켜 진료능력의 저하를 일으킬 수 있다.”

교과서적인 답변이다. 실제 의료 현장에서 환자와 환자 가족들은 의사에게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치료해주세요”라고 부탁한다. 우리는 또 그들에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우리가 AI의 조언처럼 감정을 아예 배제하지 못하는 것은-여전히 환자는 의사에게 부탁하고 의사도 진료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아마도 아직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 아닐까.

<최병현 양산부산대병원 간담췌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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