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의 지옥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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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여름 출입처인 경찰서에서 기자단과 경찰이 오찬을 가졌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활동가들이 경찰의 출석 요구에 서울지역 경찰서들에 엘리베이터 등 교통약자 이동편의시설부터 설치하라고 요구하던 때였다. 경찰 간부가 먼저 전장연 이야기를 꺼냈다.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면 온다고 하는데, 그러면 우리야 좋지”라며 웃었다. 부하직원인 또 다른 경찰 간부는 “장애인 전동휠체어 배터리도 빼고 그랬는데 지금은 인권 때문에 안 돼”라고 거들었다. 다른 경찰들과 기자들의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침묵을 메우려 낸 소리쯤으로 이해하기에는 영 뒷맛이 깔끔하지 않았다. 웃음을 보태지 않는 것으로 소심한 저항을 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회원들이 2일 서울 용산구 삼각지역에서 장애인 권리 예산 확보를 위한 지하철 타기 행동에 나섰으나 승차를 저지당하고 있다. /한수빈 기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회원들이 2일 서울 용산구 삼각지역에서 장애인 권리 예산 확보를 위한 지하철 타기 행동에 나섰으나 승차를 저지당하고 있다. /한수빈 기자

사회적 약자를 향한 공권력의 멸시가 상부 권력의 승인 아래 공공연하게 힘을 발휘하고 있다. 장애인 권리 예산 보장을 요구하며 1년 넘게 지하철 탑승 시위를 벌이는 전장연에 대해 정부와 서울시, 서울교통공사가 ‘강경대응’ 방침을 밝히면서 시위현장에 투입되는 경찰 물리력의 수위가 나날이 세지고 있다. 대통령실의 문의에 공사는 무정차 통과를 확정하고 경찰과 함께 열차에 타려는 이들을 막아섰다. 이 과정에서 활동가들은 몸도 마음도 다쳤다. 이들은 22년째 이동할 권리, 교육받을 권리, 일할 권리, 시설에서 나와 살 권리 보장을 요구하고 있다.

경찰관 직무집행법은 경찰 직무의 범위로 ‘국민의 생명·신체 및 재산의 보호’, ‘공공의 안녕과 질서 유지’ 등을 규정했다. 전장연의 지하철 시위로 비장애인의 이동이 늦어지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전장연이 이들의 생명과 신체를 위협하고 재산을 앗아갔나.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도 “전장연은 더는 시민들의 인내심을 시험하지 말라”고 했다. 장애인이 시민을 기다리도록 한 게 문제라는 주장이다. 이때 ‘시민’은 적어도 장애인이 아니다. 지하철을 원하는 시간에 타고 이동할 수 있는, 정규 교육을 받거나, 일터에 출근하는 비장애인의 표준에 가깝다. 법원 조정안인 ‘5분 이내 탑승’은 공공질서를 유지하면서 집회·시위 권리를 박탈하지 않기 위한 일종의 타협안이다. 서울교통공사는 이를 거부했다.

전장연 시위로 인한 4호선 삼각지역 무정차 통과를 알리는 재난문자 내용.

전장연 시위로 인한 4호선 삼각지역 무정차 통과를 알리는 재난문자 내용.

정작 시민의 생명이 위협받은 이태원 참사 현장에서는 수많은 인파가 예고됐음에도 정부 재난안전체계와 경찰 공권력 모두 작동하지 않았다. 경찰과 서울교통공사 등이 참석한 회의에서 무정차 통과가 논의됐지만 당일에는 이뤄지지 않았다. 낯부끄러운 ‘네 탓 공방’만 벌였다. 그랬던 정부가 당초 요구한 장애인 권리 예산 증액분의 0.8%만이 반영되자 시위를 재개한 장애인 단체에는 경찰 투입과 무정차 통과를 감행했다. ‘지하철 타기 불법시위로 무정차 통과하고 있다’는 재난문자도 시시각각 보냈다. 이상한 나라의 직무 집행이다.

전장연을 미워하는 마음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미움에 그치지 않고 국민을 위해 일해야 하는 이들과 우리가 뽑은 권력에 질문을 던지려고 한다. 경찰력을 배치하고 재난문자를 보내는 기준이 무엇인지, 이대로라면 올 한해 내내 이어질 전장연 시위를 끝낼 정부의 대안은 과연 있는지, 250만여명의 장애인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정책은 마련했는지 등 궁금한 게 한둘이 아니다. 법률가들과 언론 그리고 시민들은 국가권력이 법을 따르는지, 휘두르는지 감시해야 한다. 그나마 ‘덜 이상한 나라’에서 살기 위한 방법이다.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조차 모르는 권력이 운전하는 국가야말로 ‘지옥철’ 아닐까.

<박하얀 사회부 기자 whit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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