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칼협과 난쏘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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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연시를 맞아 한 해를 정리하는 글을 자주 접한다. ‘올해의 인물’, ‘올해의 사건’, ‘올해의 책’ 등 특정 분야에서 2022년을 대표하는 한 가지를 꼽은 기사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교수신문이 매년 발표하는 ‘올해의 사자성어’도 그중 하나다. 교수신문은 2022 올해의 사자성어로 ‘과이불개(過而不改)’가 선정됐다고 밝혔다. 과이불개는 <논어> ‘위령공편’에 처음 등장하는 말로, ‘잘못을 하고도 고치지 않는다’는 뜻이라 한다. 이태원 참사와 같은 국가적 비극에도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세태를 반영했다.

조세희 작가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78) 표지 / 경향신문 자료사진

조세희 작가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78) 표지 / 경향신문 자료사진

온·오프라인의 경계가 허물어진 요즘, 세태를 가늠할 수 있는 한 가지를 꼽자면 ‘올해의 밈(meme)’이 아닐까. 카타르월드컵을 기점으로 ‘중꺾마(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가 반짝 흥하긴 했지만, 결국은 ‘누칼협’이 2022년의 밈으로 꼽힐 듯하다. 지난해 7월 무렵 게임 커뮤니티에 처음 등장한 이 신조어는 ‘누가 칼 들고 협박했냐’의 준말이다. 불합리한 사회구조나 부당한 업무환경 등에 문제 제기를 하는 사람에게 “네가 처한 악조건은 누가 억지로 강요한 것이 아니라 네 자유의지에 따라 스스로 선택한 결과”라며 냉소할 때 쓰인다.

등장한 지 1년 남짓 된 이 신조어가 널리 쓰이게 된 건 올 초부터 시작된 고금리 기조에 ‘영끌족’을 조롱하기 위해 사용되면서부터다. 저금리 기조에 부동산·주식이 급상승하던 때에만 해도 ‘벼락거지’ 등 신조어가 나오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들이 조롱받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지난 9월 공무원들의 임금 인상 시위 때도, 11월 화물연대 파업 때도 어김없이 누칼협이 등장했다. ‘말이 칼이 된’ 이 단어는 끝내 ‘이태원 핼러윈 참사’라는 유례없는 비극 앞에도 횡행했다. 소셜미디어 빅데이터 분석업체 ‘썸트렌드’에 따르면 지난 1년간 누칼협 언급량이 가장 많았던 날은 이태원 참사 이틀째인 지난해 10월 30일이라고 한다.

그래서 누칼협은 올해의 밈인 동시에 ‘최악의 밈’이다. 저항할 수 없는 폭력에 의한 선택이 아니라면, 모든 선택은 오롯이 개인의 자유의사에 기인한 것이라는 착각. 이런 기조 아래 웃을 수 있는 건 ‘마땅히 책임져야 하는 이들’뿐이다. 사회구조적 원인을 지우고, 모든 문제의 원인을 개인 탓으로 돌리는 누칼협 세상에선 정치적·사회적 책임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더 큰 문제는 누칼협이 대세가 된 사회에서 조롱의 칼날은 언제든 ‘나’를 향할 수 있다는 점이다. 넘어진 자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기보다 ‘악으로 깡으로 버텨라’라고 말하는 사회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20대들은 절대 희망의 끈을 놓지 말아요. 냉소주의에 빠지면 헤어나지 못해요. 공동의 일, 공동의 숙제를 해낼 수가 없어요. 냉소주의는 우리의 적이 제일 좋아하는 겁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78)을 쓴 조세희 작가는 2008년 11월 14일 ‘난쏘공 출간 30주년 기념 낭독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난쏘공>에서 사회 불평등 구조를 문학적 은유를 통해 드러냈던 그는 “난쏘공이 더 이상 읽히지 않기를 바란다”고도 했다. 그런 시대는 아직 오지 않았다. 불평등은 그대로인데, 냉소주의는 만연한 사회가 됐다. 지난해 12월 25일 별세한 조 작가의 생전 외침이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이유다.

<이유진 사회부 기자 yjle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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