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제대로 된 정책 반성문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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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9월 11일, 일군의 테러범들이 납치한 민간 항공기들로 세계무역센터, 미국 국방성을 공격해 3000여명이 사망했다. 9·11 테러로 미국 전역은 충격과 슬픔에 빠져 있었다. 누구도 쉽게 정부 책임론을 제기하기 어려웠다. 당시 미국의 지식인이자 평론가인 수전 손택이 9월 27일 뉴요커에 짧은 글을 기고했다. 응징의 분위기가 지배적인 와중에 성찰을 권하는 목소리였다.

10월 27일 민주노총 공공연대노동조합 조합원들이 서울 용산구 대통령 집무실 인근에서 열린 공공부문 비정규직 청년노동자 요구안 발표 기자회견에서 불평등·차별 상자를 밟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10월 27일 민주노총 공공연대노동조합 조합원들이 서울 용산구 대통령 집무실 인근에서 열린 공공부문 비정규직 청년노동자 요구안 발표 기자회견에서 불평등·차별 상자를 밟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이번 테러가 미국이 저지른 특정 행위와 미국이 맺은 동맹 관계들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목소리는 어디로 간 것일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현재 미국이 이라크에 폭격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그리고서 역사적인 문장을 남긴다. “우리 모두 슬퍼하자. 그러나 다 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Let’s by all means grieve together. But let’s not be stupid together).

<좋은 불평등>의 저자인 최병천 신성장경제연구소장이 필자에게 보낸 공개 반박문을 보고, 문득 수전 손택의 문장이 떠올랐다. 최 소장은 ‘진보 혁신’을 위해 <좋은 불평등>을 집필했다고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최 소장은 진보의 실패를 기회 삼아 잘못된 패인을 제시하고, 민주당과 진보진영, 또한 범중도층에게 엉뚱한 방향으로 가자고 획책하는 것처럼 보인다. 지난 실패가 안타까울 순 있으나, 다 같이 어리석게 행동해선 곤란하다. 모든 실패가 성공의 밑거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실패를 정확하게 진단해야 성공의 기반이 될 수 있다. 그런 진단 없이, 실패가 만들어내는 분위기에 편승하는 담론은 더 큰 실패를 부를 뿐이다.

<좋은 불평등>의 핵심 주장 두가지 개인적으로 필자는 이번 토론이 무척 반갑다. 한국의 공론장에서 정책 평가, 정당 노선을 둘러싼 논의가 굉장히 드물고, 이런 논의를 위해 잡지 지면으로 실명 비판을 주고받는 사례는 더욱 흔치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선 짧게나마 유감을 표명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최 소장은 최근 기고에서 필자의 지적과 비판을 ‘지엽적인 시비걸기’, ‘비판을 위한 비판’으로 치부했다. 결례가 반복되면 태도가 되고, 결례가 태도인 사람에게 예의를 갖추는 것만큼 부질없는 짓이 없다. 다만 이 글은 최 소장에게 보내는 글이 아니라 공론의 장에 내보내는 글인 만큼 최대한 감안하고 자제하려고 한다. 평소라면 하지 않을 조언을 최 소장에게 건넨다. 정말 설득력 있는 반론을 펴고자 한다면 비판하는 사람의 입장이 돼봐야 한다는 것이다. 비판을 입체적으로 이해해야 그에 대응하는 논리도 강해질 수 있다.

다시 <좋은 불평등> 얘기로 돌아가보자. 최 소장이 펴낸 이 책은 크게 두가지 주장을 담고 있다. 하나는 한국 불평등의 ‘최대’ 요인이 중국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소득주도성장이 실패했다는 것이다. 두 주장 모두 겨냥하는 대상이 분명하다. 첫 번째 주장은 기존 진보진영을 겨냥한다. 그동안 진보진영은 불평등의 원인으로 이 책의 표현에 따르면 이른바 ‘3대 적폐’인 ‘재벌, 신자유주의, 비정규직’을 지목했지만, 최 소장의 분석에 따르면 중국의 경제 부흥이 한국 불평등의 최대 원인이다. 따라서 ‘3대 적폐론’은 틀렸다고 최 소장은 주장한다.

소득주도성장을 비판하는 두 번째 주장은 문재인 정부를 조준한다. 그동안 소득주도성장에 대해선 ‘최저임금의 인상 속도가 빠르다’, ‘분배 개선이 성장으로 이어질 개연성이 부족하다’ 등이 주된 비판이었지만, 최 소장은 신박한 논리를 개진한다. 바로 “불평등 문제=노인빈곤 문제”(책 353쪽)인데도 소득주도성장이 진짜 하층이 아닌 저임금 근로자를 지원해 실패했다는 것이다. 최 소장은 “문재인 정부 경제정책팀이 노동운동 중심 담론에 과도하게 경도됐고, 진보성향 정당의 입장에서 노인들은 표가 되지 않는다는 인식이 작용해 노동자조차도 되지 못하는 진짜 하층, 진짜 민중을 발견하지 못한 것”(책 353쪽)이라고 진단한다.

우선 최 소장이 첫 번째로 제시한 주장부터 살펴보자. 그는 한국 불평등의 최대 원인으로 한중 수교와 중국의 경제 부흥을 꼽는다. 그가 주목한 것은 ‘시점’이다. 그는 1980~2019년을 시계열로 볼 수 있는 임금 지니계수 데이터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는 지니계수가 악화되기 시작한 1994년을 주목했다. 우리의 통념상으론 IMF 외환위기 이후 불평등이 확대됐다고 알고 있지만, 실제 임금 지니계수가 악화되기 시작한 시점이 1997년이 아닌 1994년이었다. 따라서 외환위기 이전부터 불평등을 악화시킨 요인이 존재한다는 가설을 세우고, 열심히 추적한 끝에 그 요인이 ‘중국’이라고 최 소장은 주장한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으로 국내 제조업 분야의 임금이 인상됐고, 1992년 한중 수교가 되자 저렴한 인건비를 찾은 자본이 공장을 중국으로 이전하고, 중국의 값싼 공산품이 국내로 대거 들어오자 섬유, 가죽, 신발산업의 노동자들이 대거 일자리를 잃었다는 게 중국발 불평등을 설명하는 논리다.

최 소장은 이 주장이 독창적이라고 주장하나, 전혀 그렇지 않다. 최 소장이 자주 언급하는 논문 ‘임금 불평등 변화의 요인분해: 2006~2015년’(정준호 외·2017)뿐 아니라 임금 불평등을 분석한 수많은 논문에서 세계화에 따른 해외 아웃소싱, 글로벌 분업체계 강화가 주된 요인이라고 지목한다. 다만 최 소장의 노고도 인정할 만한 부분은 있다. 그는 한중 교역량, 중국에 대한 직접투자비 추이 등의 데이터들로 중국발 불평등론을 뒷받침했다.

최병천 신성장경제연구소장이 집필한 <좋은 불평등>의 표지 / 메디치미디어

최병천 신성장경제연구소장이 집필한 <좋은 불평등>의 표지 / 메디치미디어

문제는 그다음이다. 중국과의 교역 확대, 해외 아웃소싱 확대 등 세계화로의 이행이 불평등의 또 다른 중요한 이유였다는 주장은 충분히 합리적이고 근거도 있으나, 최 소장은 여기서 더 나아가 무리한 주장을 펼친다. 바로 3대 적폐론(재벌·신자유주의·비정규직)을 제기한 진보경제학이 틀렸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과 관련해 최 소장은 필자에게 “중국발 요인이 불평등 변동의 ‘가장 큰’ 요인이라는 <좋은 불평등>의 핵심 주장에 동의하는가?”라고 공개적으로 물었다. 필자가 명쾌하게 답변하겠다. “케인스가 살아돌아와도 불평등의 ‘가장 큰’ 요인이 무엇인지 밝혀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이다. 최 소장은 자신도 입증하지 못한 주장을 남들에게 동의하느냐고 묻고 있다.

잘못된 데이터 해석에 기반을 둔 결론 왜 그런지 따져보자. 불평등의 여러 요인 중 가장 큰 요인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려면 어떤 데이터가 필요할까. 한 요인의 변화가 불평등 지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계산할 수 있어야 한다. 이때 다른 요인들은 통제된 상태여야 한다(수학에선 이를 한 변수로 결괏값을 편미분한다고 표현한다). 재벌의 행태, 신자유주의의 작동 등은 워낙 포괄적이라 변수를 만들기조차 어렵고, 각각의 요인으로 불평등에 미치는 영향을 계량한 다음에 다른 요인들에서 도출된 값들과 비교해야만 “어느 요인이 불평등의 최대 원인이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최 소장은 이런 입증을 한 적이 전혀 없다. 그저 1997년 이전에 1994년부터 임금 지니계수가 악화됐다는 사실을 제시했을 뿐이다.

필자는 불평등의 요인을 따질 때 필요한 자세는 ‘무엇이 통제할 수 없는 요인인지’, ‘무엇이 통제해야 하는 요인인지’를 구분하는 것이라고 지난 기고에서 지적한 바 있다. 중국과의 교역 확대는 아무리 불평등에 악영향을 준다고 해도 통제할 수 없는 요인이다. 오히려 대응해야 하는 요인이다. 비슷한 예를 들어보겠다. 여성의 사회진출 확대도 단기적으론 불평등이 악화될 가능성이 높다. 저임금 노동자가 되는 여성들의 비중이 높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성들의 사회 진출을 통제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사회 진출을 늘리되 성별 임금 격차를 줄이는 대응 수단을 모색해야 한다. 중국과의 교역 확대, 여성의 사회 진출과는 달리 진보진영에서 제기한 재벌의 사익추구와 시장 지배력 남용, 비정규직과 사내 하청 등의 확대 등은 통제해야 하는 요인이다.

최 소장은 비정규직과 같은 ‘고용형태’가 불평등에 미치는 요인이 적다며 앞서 언급한 정준호·전병유·장지연 연구자의 논문을 제시했다. 이 논문의 분석결과, 임금 불평등에 영향을 미치는 상대적 기여도가 ‘기업 규모’, ‘근속’ 등의 요인이 각각 22.0%와 20.3%이고, 오히려 고용형태는 1.0%에 불과했다. 안타깝게도 최 소장은 이 논문을 심각하게 오독했다. 이 논문은 분석 기간(2006~2015)에 비정규직의 비중이 변하지 않아 불평등에 미치는 영향이 적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오히려 근속이란 요인은 불평등을 개선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분석기간에 장기근속자가 늘어났으나, 근속기간에 따른 임금 인상이 감소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이 논문은 고용형태의 변화가 불평등에 미치는 영향을 측정하진 않고 있다.

소득주도성장에 대한 최 소장의 비판도 엉뚱한 결론으로 이어진다. 노인빈곤의 문제가 중요하다는 최 소장의 주장은 충분히 수용할 만하다. 사실 학계의 중론이다. 그런데 최 소장은 소득주도성장이 초기에 ‘저임금 노동자’를 지원해 실패했고, 진짜 하층인 ‘노인’에게 지원을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노인과 저임금 노동자를 왜 억지로 대립시키는지 이해할 수 없다. 저임금 노동자들에겐 교육을 강화하자고 하고, 그 방법의 하나로 대학 등록금을 인상하자고 하는데, 청년들이 자신의 역량을 키우지 못하는 주된 요인이 교육비와 생활고다. 이렇다 할 자산이 없는 가정에서 자라 성인이 된 후 알바로 전전하는 청년들이 과연 미래를 꿈꿀 수 있을까.

어설픈 중도 전략을 답습 <좋은 불평등>은 여러 의미 있는 분석도 있지만, 편향적인 데이터 제시, 잘못된 데이터 해석과 엉뚱한 결론 등이 다수 있다. 이런 약한 논리적 연결고리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진보진영의 경제담론이 틀렸다’는 것을 입증하려다 무리한 논리 전개를 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왜 그런 무리한 논리 전개를 하는 것일까. 최 소장은 최근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유승민과 안철수를 지지하던 그룹을 당겨야 민주당이 집권한다”고 밝혔다. 거대 양당에 실망한 유권자가 다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최 소장은 중도 유권자를 잡으려는 정치공학적인 접근을 하는 것일까. 그게 아니길 바랄 뿐이다. 끝으로 우리에겐 정확한 반성문이 필요하다. 특히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에 대한 정확한 복기가 절실하다. 우리 모두 바보가 되지 않는 방법이다.

<윤형중 정책연구가>

윤형중의 정책과 딜레마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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