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워치의 지난해 미국 911 광고가 기억에 남는다. 교통사고로, 농장에서, 바다에서 각각 사고를 당한 이들이 워치로 911에 연결돼 결국 구조되는 실제 녹취 내용이었다. 이 광고가 이상하게 마음에서 떠나질 않는다. 해피엔딩 때문이다.
접근법이 효과적이었는지 올해 애플의 마케팅은 유독 구난에 초점을 뒀다. 아이폰은 오지에서도 위성통신으로 도움을 요청한다. GPS와 소음, 특수한 가속도 센서를 활용해 날카롭고 짧은 충격도 감지할 수 있다. 기계학습으로 교통사고 등을 인식, 정신을 잃어도 위치 정보와 함께 911을 부른다.
민간의 어떠한 혁신도 그 하부를 지탱하는 정부의 역할이 기능하지 않으면 무의미해진다. 특히 행정안전은 말 그대로 생과 사를 가르는 운영체제다. 지난여름 서울 관악구의 반지하 침수 사고는 119 신고 접수 후 ‘통한의 151분’을 흘려보낸 비극이었다.
전쟁이나 자연재해로 동시다발적 구조신호가 발생할 때 이를 받아줄 시스템이 붕괴하는 공포는 현실이 됐다. 지난 10월 29일 이태원의 밤. 미사일이 날아온 것도, 지진이 난 것도 아닌데 수도 한복판에서 정부의 역할은 먹통 상태였다.
2011년, 우면산 산사태는 서울 남부순환도로 8차선을 완전히 뒤엎었다. 직관을 믿고 도로를 차단한 한 경찰관의 용기 덕분에 수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었다. 영웅적 기지에 감동했지만, 왜 그러한 판단이 톱다운으로 내려오지는 않았는지 궁금했다. 무엇의 부재였던 걸까.
현장의 의인이라는 우연은 복제되기도, 반복되기도 힘들다. 다들 현장에서 나름의 최선을 다했을 수 있다. 더 나서기에는 책무가 아닐 수도 있고 섣불리 나섰다가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간다면 욕만 먹을 수도 있다. 결국 차이를 만드는 건 시스템과 기준이다.
기업은 고객이 기대할 수 있는 서비스 수준을 기술한 문서인 SLA(Service-Level Agreement·서비스 수준 협약)라는 걸 마련하고 약속한다. 119에 적용한다면 신고 후 (평균값인) 10분 내로 구출할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질 게 눈에 보인다면 시스템의 SLA가 무너지는 걸 막기 위해 현장에서 즉각 비상사태를 선언해 도로를 막고 라인을 치는 등의 권한을 발휘하는 식이다.
최신 기술 혁신 덕에 중앙은 현장보다 더 많은 정보를 지니고 있다. 군중 밀집도를 알리는 도시 데이터를 시는 이미 운영하고 있다. 하다못해 중국 못지않게 촘촘하게 박힌 CCTV로 내려다볼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 시간, 그 공간의 생명선은 끊겨 있었다. 최악의 경우 정부는 자신의 부재를, 즉 장애 상황을 알릴 책임도 있다. 재난 문자든, 통신이든, 방송이든, 확성기든, 어떻게든 ‘지금은 10분 내 구난이 불가능한’ 정부 먹통 상황임을 알렸더라면 다른 판단을 하는 사람들이 생겼을 터다. 지난여름에도 지역 주민이 반지하에 갇혀 있음을 누구라도 알았다면 장비를 찾아 팔 걷고 나섰을지도 모른다.
이중화하지 않는 인터넷 업자는 빈축을 산다. SLA도 없는 행정시스템은 세상을 잃게 만든다. 공문에는 ‘사망자 156명 발생’이라고 건조하게 적혔겠지만 그 수만큼의 우주도, 세계도 무너져 내렸음을 알아야 한다. 잊지 말아야 한다.
<김국현 IT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