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폴: 600미터(FALL)
제작연도 2022
제작국 미국
상영시간 107분
장르 스릴러
감독 스콧 만
출연 그레이스 펄튼, 버지니아 가드너, 제프리 딘 모건, 메이슨 구딩
개봉 2022년 11월 16일
등급 12세 이상 관람가
원래는 반나절 정도 다녀올 계획이었다. 등반사고로 사랑하는 연인을 잃고 51주 동안, 그러니까 1년 가까이 실의에 빠져 무기력증을 겪고 있는 베키. 절친 헌터는 그에게 캘리포니아 사막에 버려져 있는 TV중계탑에 오르자고 제안한다. 주저하던 베키는 헌터를 따라나선다. 베키커플과 함께 맨손 등반을 다녔던 헌터는 이제는 SNS 인플루언서로 변신했다. 관심은 돈이 된다. 팔로워들은 그의 대담한 모험에 환호했다. ‘좋아요!’를 가져다 바쳤다. 그게 수익이 된다. 원래 헌터가 구상했던 계획은 이것이었다. 51주 동안 차마 열어볼 수 없었던 베키의 연인 댄의 화장 유골을 탑 꼭대기에서 뿌려 장례를 최종 마무리할 계획이었다. 거기까진 이뤘다. 그런데 계획대로 된다면 당연히 이야기가 안 된다. 올라갈 때부터 뻐걱거렸던 철탑 사다리는 그들이 내려오려는 순간 부서지고 만다. 베키는 그 과정에서 다리에 찰과상을 입는다.
실패한 탐험 계획
꼼짝없이 600m 상공에 두 여성이 고립됐다. 너무 높은 곳이라 휴대전화도 안 터진다. 가만, 올라오다 포스팅한 죽은 사슴 사진은 SNS에 올라갔는데? 헌터가 자신의 SNS 팔로워들에게 조난 사실을 알리는 메시지를 남기고, 줄에 휴대전화를 매달아 아래까지 내려보냈지만 메시지는 전송되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물병 등 생존에 꼭 필요한 물품이 들어 있던 백팩도 떨어져 수십m 아래 안테나에 간신히 걸린다.
다른 방법은 없을까. 꼭대기에 올라갔을 때 그들을 촬영한 드론이 있지 않았나. 그걸 활용하면 되지 않을까. 불행히도 드론 역시 안테나에 걸려 있는 백팩에 들어 있다. 철탑 끝에는 조그마한 상자가 붙어 있는데 열어보니 들어 있는 건 조명탄과 쌍안경. 아마도 비상상황 대비용으로 보인다.
이 여성들은 탈출할 수 있을까. 베키의 상처난 다리에서 흘러나온 피 냄새를 맡은 독수리는 여차하면 공격하려 주위를 맴돈다. 설상가상으로 폭풍까지 다가오고 있다. 여성들의 옷차림을 보니 일교차가 큰 사막의 밤을 버텨내긴 힘들어보인다. 보통 사람이라면 꼼짝없이 저체온 사망이다.
유례없는 대참사(이태원 핼러윈 참사)가 벌어졌다.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영화 개봉 시기가 좋지는 않아보인다. 재난상황이 벌어진 마당에 재난영화라니. 스릴도 안전이 확보돼야 즐길 수 있다. 그래도 영화는 영화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재난영화의 주인공이 온갖 악조건을 뚫고 살아 돌아가기를 기대한다. 600m가 아니라 수만㎞ 상공의 우주에서도 조난당한 우주비행사가 여러 우주정거장을 거쳐 지구로 귀환하는 데 성공하는 믿기 어려운 스토리를 담은 영화(<그래비티>(알폰소 쿠아론 감독·2013))조차 있었다.
재난영화는 성장·가족영화
돌이켜보면 대다수의 재난영화는 성장영화이자 가족영화다. 영화 <2012>(롤랜드 에머리히 감독·2009)의 일곱 살짜리 딸은 그 나이 먹도록 기저귀를 차고 다니지만 엔딩장면에서 아버지에게 고백할 것이 있다며 귀엣말로 속삭인다. 이제 기저귀를 차지 않게 됐다고. 가족을 구하면서 아버지도 도리를 다했지만, 딸도 성장했다.
망자(亡者)에 대한 기억은 좋았던 일, 소중한 순간만 소환되는 법이다. 탈출을 시도하는 와중에 베키는 그동안 자신은 몰랐던 댄과 헌터의 다른 과거를 알게 된다. 그리고 사랑과 우정 사이의 감정적 딜레마를 극복해냈을 때 베키는 한단계 더 성장한다.
영화가 끝난 후 극장을 나서며 사람들은 구시렁댈 것이다. 왜 괜히 거기에 가 그런 생고생을 하느냐고. 자칫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데 너무 부질없는 일 아니었나 등. 영화의 엔딩에서 베키는 댄의 죽음을 보며 헌터가 얻었다는 교훈을 되뇐다. “인생은 찰나다. 인생은 짧고, 너무 짧다. 그래서 매 순간을 잘 활용해야 한다.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일을 해야 하고, 그 빌어먹을 메시지가 널리, 멀리 퍼지도록 해야 한다.” 독자 여러분은 동의하는지.
영화를 보면서도 계속 드는 상념은 이것이다. 이 참사를 겪고도 내년 핼러윈엔 아무 일 없다는 듯 이태원에 웃는 낯으로 갈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마음이 무겁다.
영화 무대인 B67 TV타워의 높이는 600m로 설정돼 있다. 영화의 원제는 그냥 폴(FALL), 그러니까 추락 정도로 번역될 수 있는 심플한 제목인데 한국에서 개봉하면서 600m를 덧붙였다.
영화는 실제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었을까. 600m짜리 B67 TV타워는 미국 캘리포니아 월넛 그로브에 있는 KXTV/KOVR 라디오타워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감독은 말한다. 1986년에 만들어진 타워로 현재는 사용하지 않는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봐도 관광지로 뜨지 않는 걸 보면 실제로 황량한 사막에 버려진 송신탑인 듯하다.
실제 인터넷 사건 사고를 찾아보면 2000년 5월 9일 불꽃놀이를 보러 이곳에 올라간 3명의 10대 소녀가 추락하는 사고가 있었다. 이 사건 후 송신탑 출입구는 폐쇄됐다고 한다. 그럼에도 워낙 높은 곳이라 모험을 즐기는 베이스캠퍼들이 몰래 올라가 뛰어내리는 일이 종종 있다고 한다. 2005년에도 한 베이스캠퍼가 뛰어내리다 낙하산이 지지대에 걸려 구조대가 출동하는 일이 있었다.
영화를 보다 보면 중간쯤을 통과하면서 헌터가 이곳이 에펠탑 꼭대기 높이라는 말을 한다. 실제 에펠탑 높이가 300m이므로 송신탑이 딱 두 배 높다.
참고로 현재 인간이 만든 건물 중 제일 높은 마천루는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의 부르즈 할리파로 828m다. 현재까지는 2014년 완공된 중국 상하이타워(632m)가 두 번째다.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 건설 중인 118층짜리 빌딩 KL118이 완공되면(언론보도를 보면 올해 3분기에 완공예정이라는데 왠지 완공됐다는 소식은 아직 들리지 않는다) 이 빌딩이 두 번째(679m)가 될 예정이다. 빌딩은 아니지만 높이만 따지면 영화의 모티브가 된 KXTV/KOVR 타워가 세계에서 네 번째로 높은 인공건축물인 셈이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