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는 어디 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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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즈로 본 세상]대표는 어디 가고

상복을 입은 축산 농민이 사무실로 들어선다. 정장을 입은 본사 직원이 그들의 길을 조심스레 막았다. 분노한 상복의 노인은 목소리를 높였다. 정장의 남자는 힘없이 비켜서며 “저도 다음 달이면 이곳을 떠나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상복의 노인은 “다 안다”면서 목소리를 낮췄다. 푸르밀에 원유를 납품했던 축산 농민들은 지난 10월 17일 종이로 된 ‘원유공급 해지 내용증명’을 받았다. 같은 날 본사 직원들은 다음 달 30일까지만 근무하라는 ‘정리해고 통지 e메일’을 받았다. 본사 직원들이 오는 11월 30일까지는 축산 농민의 길을 막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피해자가 피해자를 막아야만 하고, 피해자가 피해자를 위로해야 하는 현장이다.

1979년부터 40년 넘게 푸르밀에만 원유를 납품하던 농민들은 지난 10월 25일 ‘무책임 독단 폐업, 푸르밀 규탄’이 적힌 깃발을 들고 서울 영등포구 푸르밀 본사를 찾았다. 하루라도 우유를 짜지 않으면 유방암 발병의 위험까지 있는 젖소를 놓아두고 상경한 전북 임실 축산 농민들이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2년 전 8억원의 빚을 내 목장을 시작했다는 마흔한 살의 농민은 “젖소 47마리 전부 팔아봐야 1억원 남짓”이라며 깃발 아래서 분개했다. 상복의 농민들과 해고까지 한 달여 남은 담장 너머의 직원들도 보았을 이 깃발을, 출근도 하지 않고 “심신이 미약해 농민들을 만나지 못한다”고 전한 푸르밀 신동환 대표이사만 보지 못했다.

<사진·글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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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뒤척인다. 겨우내 마음 편히 잠을 자지 못해 머리에 스모그가 낀 듯 무겁다. 창밖을 보니 눈이 내린다. 이상기온이 일상이 돼간다. 기후변화의 징후인 3월 중순 눈 쌓인 풍경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고 불길하다. 자연 시스템의 불안정성만큼이나 정치와 사법 시스템 또한 아슬아슬하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둘러싼 사회적 긴장은 한국 민주주의가 직면한 불안정성을 드러낸다. 일만 년간 이어온 기후 안정성과 40여 년이 채 안 된 한국의 민주주의는 기간으로는 비할 데 아니지만, 우리 삶에 당연히 주어지는 조건으로 여겨졌던 점은 흡사하다. 이번 겨울 기후환경이든 정치체제든,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것들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 여실히 드러났다. 기후위기와 정치위기라는 무관해 보이는 두 위기는 사실 그 원인 면에서도 맞닿아 있는데, 효율과 성과가 최우선시되는 과정에서 다른 중요한 가치는 간과했다는 점이다. 한국사회는 산업화하는 과정에서 빠르게 성장하는 법을 배웠지만, 화석 연료 중심의 에너지 구조를 전환하는 데 게을렀고, 정치적 다양성과 세대 간의 이해를 구현하지 못했다. 우리는 경쟁을 통해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지만, 이제는 그러한 방식의 성장이 우리 사회를 갉아먹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