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렌즈로 본 세상]대표는 어디 가고](https://img.khan.co.kr/newsmaker/1501/1501_8.jpg)
상복을 입은 축산 농민이 사무실로 들어선다. 정장을 입은 본사 직원이 그들의 길을 조심스레 막았다. 분노한 상복의 노인은 목소리를 높였다. 정장의 남자는 힘없이 비켜서며 “저도 다음 달이면 이곳을 떠나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상복의 노인은 “다 안다”면서 목소리를 낮췄다. 푸르밀에 원유를 납품했던 축산 농민들은 지난 10월 17일 종이로 된 ‘원유공급 해지 내용증명’을 받았다. 같은 날 본사 직원들은 다음 달 30일까지만 근무하라는 ‘정리해고 통지 e메일’을 받았다. 본사 직원들이 오는 11월 30일까지는 축산 농민의 길을 막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피해자가 피해자를 막아야만 하고, 피해자가 피해자를 위로해야 하는 현장이다.
1979년부터 40년 넘게 푸르밀에만 원유를 납품하던 농민들은 지난 10월 25일 ‘무책임 독단 폐업, 푸르밀 규탄’이 적힌 깃발을 들고 서울 영등포구 푸르밀 본사를 찾았다. 하루라도 우유를 짜지 않으면 유방암 발병의 위험까지 있는 젖소를 놓아두고 상경한 전북 임실 축산 농민들이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2년 전 8억원의 빚을 내 목장을 시작했다는 마흔한 살의 농민은 “젖소 47마리 전부 팔아봐야 1억원 남짓”이라며 깃발 아래서 분개했다. 상복의 농민들과 해고까지 한 달여 남은 담장 너머의 직원들도 보았을 이 깃발을, 출근도 하지 않고 “심신이 미약해 농민들을 만나지 못한다”고 전한 푸르밀 신동환 대표이사만 보지 못했다.
<사진·글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