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밤만큼 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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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마음을 할퀴고 가는 사건이 있다. 지난 9월 14일 발생한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도 그중 하나였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있었던 위험 신호들이 하나씩 드러날 때마다 탄식했다가, 화가 났다가 이내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 무렵 퇴근 후 친구들과 맥주 한잔을 곁들인 저녁식사를 하고 한밤중 골목을 걸으면서, 살아 있었다면 이따금 웃고 떠들었을 피해자가 생각나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지난 9월 21일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 희생자를 위한 촛불 추모제가 서울 중구 신당역 앞에서 열리고 있다. / 김창길 기자

지난 9월 21일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 희생자를 위한 촛불 추모제가 서울 중구 신당역 앞에서 열리고 있다. / 김창길 기자

무엇보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형사 절차를 밟을지 고민하고 있을 젠더폭력 피해자들이 떠올랐다. 상당수의 피해자가 고소를 고려하지만, 고민을 거듭하다 실행으로 옮기지 않는다. 들이는 에너지에 비해 돌아오는 효용은 적을 것이라는 주변의 만류가 잇따르고, 고소 이후의 파장이 감당 가능한 범위를 벗어날 것이라는 두려움이 밀려든다.

그럼에도 이 사건의 28세 여성은 형사고소를 택했다. 사법체계에 대한 신뢰가 어느 정도 있었을 것이다. 가해자에게 죗값을 물어 피해를 조금이나마 회복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 하지만 이번에도 국가는 젠더폭력에 무심했다. 보호 조치를 취하지 않은 이유를 묻자 경찰은 “피해자가 원하지 않는데 조치를 적용하는 게 맞느냐”고 되물었다. 지난해 11월 ‘김병찬 스토킹 살인사건’이 일어나자 스토킹 위험도를 판단하는 회의를 열고 적극적으로 피해자를 보호하겠다던 약속이 무색하다. 경찰은 피해자가 2차례 고소한 이후에도 회의를 열지 않았다.

사건 당사자는 직장 내 성폭력 피해자이기도 했다. 피해자는 가해자가 피소됐다는 소식이 직장에 전해진 이후 2차 가해에 시달린 것으로 보인다. “직원들이 (피해자가) 우리 언니인 줄 모르고 ‘그 사람(가해자)은 착하고 좋은 사람인데 누가 신고했을까’ 이런 식으로 이야기했대요. 그때 직원들이 언니를 한 번 죽인 거예요.”(피해자 가족 인터뷰) 서울교통공사는 가해자를 직위 해제하고도 내부망 접속 권한을 그대로 둬 피해자 정보가 유출되도록 방치했다. 사건 이후에도 보여주기식 땜질 처방에 급급했으며, 분향소에 피해자의 실명을 노출했다. 직장 내 성폭력 피해자가 조직에 피해 사실을 밝히고 지원을 요청하기 어려운 현실을 보여주는 면면이다.

폭력의 고리는 지독하게 이어진다. 사건이 벌어지고 온 세상이 떠들썩한 뒤에도 폭력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반복된 학습을 통해 안다. 밤은 밤일 뿐, 갑자기 해가 뜨지 않는다. 그런데도 긴긴밤이 두렵지만은 않은 건 밤을 나누는 이들이 조금씩 늘어날 거라는 일말의 희망이 있어서다. 이란에선 22세 여성 마흐사 아미니가 히잡을 제대로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돼 숨진 사건이 반정부 시위로 번졌다. 여성들은 히잡을 벗어 던지고 자기 머리카락을 자르고 있다. 시위에 참여해 여성들과 연대하는 남성들도 눈에 띈다. 신당역 추모 현장에 모인 젠더폭력 피해자들은 시민들과 함께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우리는 밤만큼 멀리 걸어야 합니다. 각자의 밤만큼 멀리요. 자아를 뚫고 어둠을 향해 걸어야 합니다.”(엘렌 식수 <글쓰기 사다리의 세 칸>) 각자의 밤만큼 멀리 간다면 조금은 덜 외롭게 어둠을 지날 수 있지 않을까. 여전히 어둡겠지만, 이전과는 다른 어둠인 채로.

<박하얀 사회부 기자 whit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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